벌구신화열번째이야기

"그러게 조금만 더 일찍 오셨어야지요."

여우리는 벌구의 표정 변화를 가만히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허허... 그거 참!"

벌구는 너무 기가막힌 듯 가벼운 한숨을 연거푸 몰아내 쉬더니 빈입맛을 쩝쩝 다시며 저 멀리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산등성이에다 시선을 바로 꽂았다.
그리고는 얼이 빠진 듯 잠시 멍하니 그대로 서있었다.
그는 지금, ''아, 아! 내가 겨우 이런 소리를 들으려고 저 멀고먼 곳에서 죽을 고생을 해가며 험준한 산을 타고넘어 이곳까지 찾아왔더란 말인가!'하고 한없이 허탈해하는 모습이었다.

"자, 제가 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얘기해 드릴터이니 우리 저기 보이는 검은 바위 있는 곳까지 올라가기로 해요."

처녀 여우리가 집게 손가락으로 바로 앞에 보이는 산 중턱을 가리키며 벌구에게 다시 말했다.

"아, 그만! 이제 다 끝났습니다!"

벌구가 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말했다.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처녀 여우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떠서 벌구를 쳐다보며 물었다.

"제가 함께 데리고갈 사람이 없다는 걸 이제 알았으니 더 이상 이곳에 제가 머물러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구태여 그 사연을 알고 싶지도 않구요. 아무튼 즐거웠습니다.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 제가 무척 고마워한다는 인사말이나 대신 전해주십시오."

벌구는 이렇게 말하며 처녀 여우리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작별 인사를 하려고하였다.

"어머머! 잠, 잠깐만요! 돌아가신 아버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북쪽에서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분이 뭐 이래요? 시시하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가시려고요?"

여우리가 크게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벌구에게 말했다.

"제가 들어봤자 가슴만 아프고 미어지는 얘기일 터인데 그런 걸 뭐하러 듣겠습니까?"

"아니, 그럼... 옛날 당신 아버님께서 힘들게 지어놓고 떠나셨던 저 검은 바위성에도 찾아가보지 않겠다는 말씀인가요?"

"뭐? 뭐라고요? 검은 바위성?"

"네, 그걸 흑성(黑城)이라고도 불렸지요."

"그 그게 있단 말입니까?"

벌구가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바로 나와요."

"그 그럼... 가봅시다."

"아, 잠깐만요! 제가 먼저 할 일이..."

그녀는 다시 주저앉더니 조금 전에 진흙을 발라놓았던 자기 얼굴을 개울물로 깨끗이 다시 씻어내기 시작했다.

"아,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진흙을 바를 때 발라야 효과가 있는 거지, 나 같은 사람하고 있을 때 발라봤자 뭐하겠어요?"

벌구가 약간 장난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머! 뭔가 착각을 하시네요?"

개울물로 말끔하게 세수를 다시 마친 여우리는 천천히 다시 일어나면서 벌구를 살짝 흘겨보았다.

"착각? 착각이라니요?"

"사실을 말하자면, 조금 전 벌구님이 제게 말을 하실 때 침이 튀어나와 내 얼굴에 조금 묻었다구요. 그래서 제가 다시 씻어낸 거예요."

"뭐, 뭐라구요? 아니, 그 그럼... 더러운 진흙을 얼굴에 발라놓은 건 괜찮고, 그 위에 내 침방울이 조금 튀어 날아가 묻은 건 더럽단 말입니까?"

벌구가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어머머! 더러운 진흙이라니요? 그건 내 아끼는 화장품인데...."

여우리는 벌구에게 톡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여우리의 얼굴은 너무너무 앙징맞고 귀여워보였다.

"으으음...."

벌구는 그녀의 이런 말을 듣고나자 속이 무척 상했지만 그러나 체면상 이것을 가지고 크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이때,
여우리는 자기 허리춤에서 조그만 진흙 뭉치를 또 꺼내들었다.

"아앗! 또 무슨 일을 하려고?"

벌구가 소리쳤다.

"보면 몰라요? 화장을 또 해...."

벌구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살짝 내리쳤다.

"어머머! 아아니, 이게 무슨 짓..."

그녀의 가느다란 비명소리와 함께 손에 들려있던 조그만 진흙덩어리는 개울물 아래로 뚝 떨어져버렸다.
그녀는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허리를 굽혀가지고 개울물 속에 빠진 진흙덩어리를 얼른 다시 주으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물 속에서 완전히 풀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이지요? 남이 아끼는 것을..."

그녀는 발끈 성을 내며 벌구에게 소리쳤다.

"그게 아깝나요?"

"아깝지요? 적어도 내 화장품인데..."

"이제부터 그런 거 바르지 마세요."

"왜요?"

"그냥 생긴 그대로 사시라구요."

"흥! 남이야 어떻게 살든말든... 좌우간 당신같은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 내가 항상 덤으로 갖고다니는 게 있으니 다행이네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허리춤을 뒤적거리더니 또다시 조그만 뭉치 한 개를 또 꺼내들었다.

"아, 아니... 그 그것도 진흙덩어리요?"

벌구가 놀란듯 소리쳤다.

"그래요. 참, 그런데... 재수없이 진흙덩어리라고 자꾸 그러지 마세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가 애용하는 화장품으로서..... 어어머나!"

그녀가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벌구는 그녀의 조그만 두 어깨를 잡아 뒤로 살짝 밀어버렸고, 그녀는 발라당 뒤로 넘어짐과 동시에 개울물 속으로 퐁당 빠져들어갔다.
한자 반 정도 되는 깊이의 얕은 물속이었지만 그녀의 온 몸 구석구석을 완전히 적셔주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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