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군 백곡 김득신, 초인적 독서로 59세 과거급제 ‘대기만성’ 전형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19)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괴산읍 능촌리에 있는 취묵당. 김득신이 59세에 세운 독서재로, 그가 이곳에서 <백이전>을 1억 1만 3000번을 읽었다고 하여 일명 ‘억만재’로도 불린다. 괴강 쪽 기둥에는 그의 대표작인 <龍湖>를 양각한 주련이 걸려 있다.

조명희 문학관을 나와 증평으로 가는 길엔 조벽암이 동행합니다. 농민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로 특히 광복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조벽암은 조명희와 숙질간으로, 어릴 적부터 숙부 조명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재학 중인 1930년대 중반부터 이미 카프의 동반작가로서 또 구인회 동인으로서 시와 소설을 발표하며 두각을 드러냈고, 시집 《향수》, 《지열》을 잇달아 펴내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발표한 <실직과 강아지>, <취직과 양> 같은 소설들은 실업 지식인과 전과자 지식인의 불우한 처지를 동물에 비유, 표현한 것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과 지식인적 윤리의식이 엿보이는 작품으로 꼽힙니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을 지냈고, 1948년 남조선 인민위원회 대표위원 자격으로 월북하여 평양문학대학 학장, 조선작가동맹의 기관지인 《조선문학》의 주필 등을 역임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대한민국 사회에서 월북 작가의 운명은 대개 비슷합니다. 조벽암은 드물게 잇단 숙청을 피해 살아남은 작가이니 더했을지도 모르죠. 분단 이후 우리 문학사에서 철저하게 잊혔다가 2004년 영남대학교 이동순 교수팀에 의해 《조벽암 시 전집》이 묶여 나온 것을 계기로 작가로서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해만 저물면 바닷물처럼 짭조름이 절인 旅愁/오늘도 나그네의 외로움을 車窓에 맡기고//언제든 갓 떨어진 풋송아지 모양으로/안타까이 못 잊는 鄕愁를 反芻하며//아늑히 살어둠 깃들인 안개마을이면/따스한 보금자리 그리워 포드득 날아들고 싶어라”― 그의 시 <향수>에서 수구초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증평읍 율리 삼기저수지 둘레길에 조성된 김득신 독서상.

월북작가 조벽암 숙부 조명희 영향

조벽암과 이별하고 증평으로 들어섭니다. 증평은 괴산군에 속해 있다가 2003년 군으로 분리·승격한 지역인데, 행정구역이 증평읍과 도안면, 1읍 1면뿐이어서 면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울릉군 다음으로 작습니다.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유명한 백곡 김득신(1604∼1684)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명장인 김시민의 손자입니다. 증평군이 그의 현양 사업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그의 묘소가 증평읍 율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괴산에 취묵당을 세우고 독서하며 만년을 지낸 까닭에 사실 ‘김득신’은 괴산군의 것이라고 생각한 콘텐츠였는데, 증평군이 적극적으로 선점하여 ‘대표 인물’로 삼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김득신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머리가 둔했다고 합니다. 10살이 돼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읽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수준이니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죠. 주위에서 저런 둔재가 있느냐고 혀를 찼지만 그의 아버지는 대기만성을 믿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친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김득신은 엄청난 열정으로 책읽기에 몰두하였고, 그칠 줄 모르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취묵당에 걸린 <독수기>에 책 읽은 횟수를 적어 놓았거니와 그의 독서열은 가히 엽기적이라 할 만합니다. <백이전>은 무려 1억 1만 3000번을 읽었고, <노자전>, <용설> 들은 2만 번, <제약어문>은 1만 4000번을 읽었다고 하거니와 1만 번 이하로 읽은 것은 아예 꼽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1억’은 10만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취묵당을 달리 억만재(億萬齋)라고 불렀을까요. 하여튼 그런 독서행각은 꽤나 유명한 것이어서 그의 친구들도 다른 건 몰라도 그의 눈물겨운 노력만큼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인고의 노력 끝에 글을 한 편 지어 부친에게 올리게 된 것이 그의 나이 20세 때였고, 더욱 정진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아간 것이 59세 때였으니 가히 인간승리라 할 만합니다.

▲ 김득신의 한시 <율협도중>을 새긴 시비. 율리 저수지 둘레길과 마을 곳곳에서 그의 시비를 볼 수 있다.

초인적 노력으로 문학적 성과

김득신은 식사할 때도 책을 놓지 않고 밤에는 늘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잤습니다. 그러니까 혼자 있을 때면 글을 외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해야 옳겠습니다. 생활이 그러니 재미있는 일화도 많습니다.

한번은 하인에게 말을 잡히고 어느 집 앞을 지나다가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듣더니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 하니 하인이 올려다보며 “부학자 재적극박 어쩌고저쩌고, 그건 나으리가 만날 읽으셔서 쇤네도 알겠는데 나으리가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그제야 김득신은 책이 닳도록 읽은 <백이전>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인도 지겹게 들어 줄줄 외우고 있었던 것이죠.

또 그가 친구들과 시를 짓고 논 적이 있었는데, 종일 시상을 가다듬다가 저물녘에 훌륭한 시구를 얻었다며 읊은 것이 “삼산은 푸른 하늘 밖에 반쯤 떨어지고, 이수는 백로주에서 둘로 나뉘었네.” 하는 이백의 시 <봉황대>여서 친구들을 아연케 했답니다. 김득신이 풀이 죽어 “천년 전 적선이 나보다 먼저 얻었으니 석양에 붓 던지고 서루를 내려오네.”라고 탄식하니 듣던 친구들이 포복절도할 밖에요. 하도 많이 읽어서 자신이 지은 것으로 착각한 겁니다.

“물빛은 개인 뒤에 곱고/산빛은 빗속에 기이하네./이를 표현하기 실로 어려워/차라리 시 짓기를 그만둘까.”(시 <취묵당에서 우연히 읊다>) ― 김득신은 《종남총지》 같은 시화를 저술했고, 술과 부채를 의인화한 가전소설 <환백장군전>과 <청풍선생전>을 쓰기도 했지만 문보다는 시에 능했습니다. 그가 남긴 《백곡집》에는 시가 반인데, 특히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노래한 시들이 일품입니다. 한문의 사대가로 꼽히는 택당 이식에게 ‘당대의 제일’이란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김득신은 스스로 지은 묘비명에서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렸을 따름”이라 했습니다. 스스로 둔재임을 인식하고 초인적 노력을 쏟는 열정으로 문장을 이루었던 김득신의 이야기는 분명 세월을 넘어 가르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를 ‘독서의 상징’으로 내세우며 오늘날 일그러진 교육열에 편승하려는 증평군의 노력은 정곡을 벗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이라면 필시, 정작 배워야 할 것은 김득신의 공부보다 그를 믿고 기다려준 아버지의 교육관이 아니겠느냐고 쓴 소리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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