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중‧고교 800여명, 자유당 출신 사퇴 요구 시위
야당후보 13명 난립…반대시위 불구 15% 득표 당선

▲ 일제 치하 때 경찰 출신의 후보가 국회의원에 출마하자 음성 중‧고교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들 학생을 격려하기 위해 현장을 찾았다는 당시 무극고등공민학교 교사 이관복(84)씨.


기록되지 않은 4‧19
⓵ 미완의 혁명
⓶ 타오른 불꽃
⓷ 지역별 7‧29부정선거운동 Ⅰ
지역별 729부정선거운동
⑤ 끝나지 않은 4‧19

“음성 중·고생 약 800여명은 7월 22일 정오에 반혁명세력 규탄데모에 돌입했다. 이들은 결의문을 작성하고, 약 1시간여 동안 시위를 했다.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4월 혁명 완수와 지난 자유당 정권에 아부하는 부정선거 원흉들은 물러가라. 이 시위는 어떤 정당이나 누구에 의한 사주가 아니다. 반혁명세력 물러가라. 기동경찰 필요 없다. 즉시 해산하라. 혁명정신 받들어 제2공화국 사수하자.”

 

“경찰서장이 집차에 앰프를 설치하고 인사를 하고 다녔어. ‘대통령에 이승만 각하, 부통령에 이기붕 의장이 당선됐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경찰서장이 방송을 했다니까.”

1960년 정·부통령 선거 직후에 음성경찰서장이 마을을 다니며 해괴한 당선사례를 했다. ‘공무원의 엄정중립’이라는 요즘의 선거풍토에서는 절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56년 전에 있었던 대통령선거에서는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이 부정선거에 앞장섰다. 그렇기에 선거가 끝난 후에도 자유당 후보자의 당선사례를 현직 경찰서장이 했다.

이관복(음성 금왕읍. 85세)씨는 3.15 선거에서 경찰들이 부정선거를 주도했다고 증언한다.

“해방 후에 조병옥 경무부장이 ‘경찰 채용에 있어서 경력이 있는 사람을 우선 채용해야 한다’며, 왜정 때 순사한 놈들을 대거 채용했지. 친일경찰들이 해방 후에도 청산되지 못한 이유였어. 3.15선거 때도 부정선거는 경찰들이 모두 다 주도했어”

3인조·9인조 선거, 사전투표, 투표율 조작 등 최악의 부정선거를 기록한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는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일제 치하 경찰 출신 국회의원 후보

결국 4월 혁명으로 이승만대통령이 사퇴하고,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다. 혁명 발발 3개월 후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변에 이변을 거듭했다. 자유당 당적을 가졌던 정치인들은 대부분 무소속의 깃발을 들었다.

선거 결과 민주당이 전체 의석의 2/3 이상을 차지했다. 충북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충북의 중·북부 지역은 상황이 달랐다. 이전에 자유당 당적을 가졌던 정치인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국회에 입성했다. 지역 주민들은 가마솥의 끓는 물처럼 불만이 팽배했다.

음성 주민들은 일제시대에 경찰을 했던 이정석씨가 자유당에서 무소속으로 변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위를 시작했다.

충북신보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음성 중·고생 약 800여명은 7월 22일 정오에 반혁명세력 규탄데모에 돌입했다. 이들은 결의문을 작성하고, 약 1시간여 동안 시위를 했다.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4월 혁명 완수와 지난 자유당 정권에 아부하는 부정선거 원흉들은 물러가라. 이 시위는 어떤 정당이나 누구에 의한 사주가 아니다. 반혁명세력 물러가라. 기동경찰 필요 없다. 즉시 해산하라. 혁명정신 받들어 제2공화국 사수하자.”

음성 중·고등학생들이 반혁명세력의 입후보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일 때, 이를 격려하기 위해 찾아간 이가 있었으니 무극고등공민학교 교사 이관복이다.

이관복은 음성의 한 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에게 ‘일제강점기 조선의 역사’에 대해 특강을 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출신 이정석은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6981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 표는 불과 15%의 득표율에 불과했다. 이렇게 적은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후보의 난립이었다. 소선거구제에서 13명이 출마했으니 13:1의 경쟁률 이었던 것이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북지역 평균 경쟁률이 6.3:1이었고, 충주와 진천은 2:1에 불과했는데, 음성지역에 후보가 가장 많이 출마한 것이다.
 


어부지리 자유당 출신 당선

선거결과에 대해 주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일제 시대에 경찰을 했고, 해방 후에는 경무대 경찰서장을 역임하며 자유당의 중요 역할을 했던 이정석이 당선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충북신보 1960년 8월 2일자는 주민들의 시위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음성군에서는 7월 31~8월 1일 양일에 걸쳐 대규모적인 테러행위가 발생했다. 7월 31일 오후 4시경 100여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었다. 이들은 ‘반혁명분자 이정석은 사퇴하라’, ‘이정석을 옹호한 자는 민족반역자다’라는 등 11개에 달하는 구호를 외쳤다. 오후 9시 10분경 격앙한 군중 약 90명이 2대의 트럭에 분승해 대소면으로 가서 이 씨 집과 그의 운동원 집 4채를 모조리 부쉈다. 이후 삼성·금왕·생극·감곡 각 면을 다니면서 이정석 선거운동원 집을 파괴했다. 이때는 각 면에서 주민들이 가세해 300명이나 되어, 7개의 트럭이 동원되었다. 시위대는 8월 1일 새벽 감곡으로 출발했다. 감곡면에서 파괴행위를 하고 오후 1시 소이면으로 향했다. 청주·진천·음성에서 출동한 경찰기동대는 수수방관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줬다. 황종률 지사는 군(軍)에 출병 요청을 고려했다. 피해액은 약 1000만환이다. 파괴 가옥 수는 삼성면 2호, 대소면 4호, 금왕면 1호, 음성읍 4호, 생극면 1호, 감곡면 5호로 총 17호이다.”

선거결과에 분노한 주민들이 음성의 각 면들을 다니며 이정석 선거운동원 집을 파괴했고, 음성 경찰병력으로 이를 해결하지 못하자, 진천과 청주에 응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위는 7.29 선거 후에 있었던 괴산지역의 주민시위와 더불어 충북지역 현대사의 최고의 시위로 기록된다.

학생 이외의 주민이 중심이 되어 테러 경향까지 보인 상기의 주민시위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기간에서 유일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음성군에서 왜 이렇게 7.29 선거에 대한 불만이 극적으로 표출되었을까? 음성은 후보가 13명이 출마할 정도로 정치적 관심이 높은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민주당 후보가 낙선한 이유는 야권후보의 난립이 그 원인이다. 민주당 구철회 후보보다 높은 득표율을 획득한 신이철, 정석훈 후보가 모두 민주당 경력을 가진 후보였던 것이다. 심지어 진보정당의 신창균 후보도 이 경쟁에 가세했다.

56년 전 음성에서의 7.29 시위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특정 정당의 지지자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혁명의 연장선 속에서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깃발만 바꾼 반혁명후보가 당선되었기에, 이에 저항한 것이다. 결국 이정석은 반민주행위자로 선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취재 김남균 기자·박만순(함께사는우리 대표)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