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최은희 충북발전연구원 연구위원

▲ 최은희 충북발전연구원 연구위원

내게는 연락할 친구라고는 오직 나밖에 없는, 본인 스스로 자발적인 은둔형 외톨이라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친구가 하나 있다. 은둔형 외톨이라 하지만 다행이 글 쓰는 재주가 있어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다. 친구의 머릿속에는 늘 캐릭터, 스토리와 플롯이 둥둥 떠다니고 있고, 나는 또 나의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어 아주 가끔 만나는 날에도 우리는 늘 뒤엉킨 대화를 한다. 우리의 만남은 공감보다는 그저 한 공간에 있고 서로의 생존을 확인했다는 안도감을 얻는데 쓰인다. 그런데 우리 사이에 공통의 대화 꺼리가 생겼다.

서로 아주 잘 아는, 우리 보다 더 젊고 더 자유롭고 더 발랄한 사고를 갖고 있는 후배가 죽음의 문턱 앞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후배의 삶의 궤적을 떠올렸다. 후배는 집이 매우 부유하여 꽃길만을 걸었으며 세상 물정을 몰라 부모가 설계해준 삶을 살았다. 부모가 설계한 삶을 후배는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내려고 하였지만, 그 대가는 가끔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것을 마음의 병이라고 했고 후배가 진정으로 그 삶에서 해방되기를 바랐다. 십 수 년이 지난 뒤에야 후배는 주체적으로 인생행로를 바꾸었고 이제 살만할 즈음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 보다 한 달 먼저 소식을 들은 친구는 무척이나 충격이었고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친구는 지금껏 아무 것도 후회되는 것이 없는데 딱 하나, 불안정한 일이라 통장에 돈이 떨어지면 어쩌나 늘 불안해했고, 무리하면서 돈을 더 벌려고 동동거린 것이 가장 후회가 된다고 했다. 즉 더 신나게 못산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달부터는 일을 줄였고 앞으로도 그러겠노라 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소식에 나도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끔 하던 질문이었지만 이번에는 기분이 달랐다. 나는 가장 먼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를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내 마음 가는 대로 살아서인지 내가 입은 상처보다 입힌 상처가 더 많다. 사실 상처를 받지 않는 인생도 없고 상처를 주지 않는 삶도 없다. 우리는 그저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과 의지를 키우며 타인의 위로와 깨달음을 통해 치유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공감능력이 부족한 나는 상처를 주기 전, 먼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부족하다. 잠시 멈추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본다면, 가족과 조직 그리고 수많은 관계 속 갈등의 많은 부분을 줄일 수 있으며 수용하고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평범한 하루를 비범하게 살아가자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느끼는 평범함과 비범함은 다를 것이나 나의 평범함과 비범함은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24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진다. 평균수명을 산다는 전제하에서 청소년은 시간자산이 중장년층보다 많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 여기를 가슴 뛰게, 더 열정적으로, 더 즐겁게 산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나의 ‘비범함’은 바로 주어진 시간에 나를 던지는 것이며 그 안에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찾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일에 나를 투신하고 있다고 합리화하지만 진정 설레는 일을 하고 있나? 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계속 하다 보면 가슴이 벅차오를 때가 올 것이라 믿는다.

나는 친구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분명한 답을 찾고 바로 실천하는 용기와 지혜는 없다. 그러나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감상적인 질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만 했던 질문을 통해 반백년 인생의 한복판에서 뜨거운 여름 더 치열하게, 다시 가슴 뛰는 삶을 거침없이 살아가라는 준엄한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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