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민중은 개, 돼지라고 말한 나향욱의 가치관은 사실 일리가 있다. 현실성과 역사성 두가지 측면에서다.

우선 우리 국민들은 인간이 동물에 비유되는 것에 아주 익숙하다. 개×끼로 상징되는 심한 욕에서부터 각종 속담에 이르기까지 그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다. 유명 정치인이나 권력가들은 대중들의 이런 해작거림에 늘 밥의 신세가 된다. 지금도 SNS에서는 쥐(박이)와 닭(대가리)이 끊임없이 출몰한다.

대권후보들에 대한 동물화(化)는 특히 유별나다. 후보들에게 붙여지는 동물의 신체적 특징과 행동 등을 곰곰 되새기다 보면 어느땐 그 비유의 기발함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최근엔 미국 트럼프의 등장으로 졸지에 한국의 트럼프로 재평가(?)되는 허경영의 동물 어록이 눈에 띈다. 그는 김무성을 이무기, 문재인을 소, 안철수를 염소, 반기문을 청개구리로 각각 비유했다. 이유는 이렇다.

지난 총선에서 옥새파동까지 일으키며 대선주자로서 입지를 힘들게 이어가고 있는 김무성은 정치력의 한계로 결국 대권까지의 승천을 못하고 이무기로 남을 운명이고, 문재인은 소처럼 사람은 좋으나 어리숙하여 국가리더십을 갖추기엔 역부족인가 하면, 그동안 자기소신이 없다하여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托卵) 뻐꾸기로 비유되던 안철수는 염소처럼 시기와 질투가 많아 끝내 자기 길을 가지 못한채 헤맬 것이고, 유엔사무총장으로서 비행기를 유독 많이 타고 다니며 세계를 누비는 반기문이지만 그의 동선(動線)은 마치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청개구리를 닮아 믿음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 잘난 사람들도 대책없이 동물로 둔갑하는 판에 그들의눈에는 99%의 별볼일없는 ‘장삼이사’로 보이는 우리들이 개와 돼지로 매도됐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아무리 미물인 개와 돼지이지만 이것들의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野性), 여차하면 1%의 주인을 물어뜯고 공격할 수도 있는 동물적 본능을 무시한 채 우리사회를 평등할 수 없다고 단정하며 아예 신분제를 공고히 하자고 강변했다는 점에선 더 이상 나향욱을 대변할 생각이 없다. 그는 대한민국의 전체를 구성하는 99% 국민, 아니 동물들의 생존적 잠재력을 좌절시켰다는 죄 하나 만으로도 당장 파면돼야 마땅하다.

▲ 민중은 개 돼지 발언의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 / 뉴시스

민중은 개, 돼지라는 나향욱의 말은 사실 유구한 역사성을 지닌 화두다. 정치 모리배(demagogue)의 술수에 넘어가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인 무지렁이 다중을 향해 플라톤은 “대중은 우매하다”고 외쳤다. 기원전에 있었던 일이다. 민주주의의 원조라는 링컨은 “개인은 똑똑하지만 대중은 멍청하다”고 했고 토인비는 “역사는 침묵하는 다수가 아닌 지배적 소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확신했다.

이들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민중은 그저 주는 대로 먹고사는 개 돼지에 불과하다는 나향욱의 발언 취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이끄는 자, 그리고 역사가들의 가장 큰 딜레마는 소수의 지배층 그리고 절대 다수를 점하는 민중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 것이고, 이 고민은 민주주의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보기엔 양아치 수준인 북한 김정은 체제가 유지되는 것, 뿐만 아니라 계층갈등과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는 우리나라의 국가운영 역시 그 고민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분명한 것은 대중과 민중은 지배자에 의해선 절대로 그 선의적 위상과 입지를 스스로 알아서 존중받고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어리석은 대중들한테 나타나는 위기상황에서의 총기(聰氣)다.

다름아닌 대중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그러기에 즉흥적이지만 용감하다는 것이다. 세계사에 기록된 거의 모든 혁명의 진원은 ‘대중(大衆)’이었지 결코 역사를 이끈다는 소수의 지배층이 아니다. 예상을 뒤엎은 지난 총선에서의 여당 참패와 지금 나향욱의 파면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의 봇물, 이런 현상 또한 위기상황에선 현실적으로 돌변하며 용감해지는 대중의 속성에 기인한다. 멀게는 히틀러에서부터 가깝게는 후세인, 카다피에 이르기까지 실패한 권력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같잖고 우매하게 여겼던 대중의 급거 반발과 역심(逆心)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나향욱의 막말에 야당은 대한민국이 졸지에 동물농장으로 돌변했다고 비판했다. 스탈린 독재의 정치적 폭력성을 풍자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들의 착취가 없는, 모든 동물들이 평등하게 사는 이상사회를 꿈꾸며 시작된다. 새롭게 건설된 동물농장의 리더는 역시 돼지였고 그 외 개(비밀경찰)와 닭(유산층), 들쥐(원주민), 까마귀(종교) 등 당시 사회를 대변하는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스탈린을 광신적으로 따르던 우매한 민중은 양(羊)이 차지했다.

그러나 소설 동물농장의 결말은 이상향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보다도 더 부패하고 착취가 심해진 사회구조다. 오로지 돼지만 특권을 누리게 되고 나머지는 희생되거나 쫓겨난다. 그러기에 동물농장은 꼭 스탈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느 시대 어느 정치에서도 그러한 인물은 늘 존재할 것이고 바로 이것이 정치, 제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국가의 근원적인 비극이자, 소설 동물농장이 세기를 넘어 끊임없이 깨우치고자 하는 ‘현재적 의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향욱에 의해 난데없이 개, 돼지가 된 우리로서는 이 참에 쥐와 닭까지 함께 어울리는 동물농장을 한번 아름답게 꾸며봤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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