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조명희, 일제 탄압 피해 블라디보스톡 망명 소련군에 죽임당해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18)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진천읍 벽암리 수암마을은 포석 조명희(1894~1938)와 조중흡(1908~1985)이 태어난 마을입니다. 조중흡의 필명인 ‘벽암’은 고향의 지명에서 가져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천군청에서 초평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벽암사거리 못 미쳐서 오른쪽이 수암마을인데, 마을 들머리에 ‘포석 문학공원’이 조성돼 있습니다. 사실 위치로 보나 크기로 보나 공원이라고 하기엔 좀 뭣합니다. 표석과 문학비 하나를 세운 게 전부인데, 그나마도 눈여겨보는 이가 없는 형편입니다. 마을 안쪽에 조명희 문학관이 건립됐으니 그쪽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 진천읍 벽암리 수암 마을 입구에 조성된 포석 문학공원. 시 <경이>가 새겨진 시비가 건립돼 있다. 네모 안은 하바로프스크 시절의 조명희 모습.

문학비에는 그의 시 <경이(驚異)>가 새겨져 있습니다. “어머니 좀 들어 주서요”로 시작하는 시는 당신에게도 낯선 작품이리라 여겨집니다. 러시아로 망명했음에도 월북 작가로 분류됐고, 광복과 분단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이념의 그늘 속에 묻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저 담 아래 밤나무에/아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뚝 하고 땅으로 떨어집니다/우주가 새 아들 낳았다고 기별합니다/등불을 켜 가지고 오서요/새 손님 맞으러 공손히 걸어가십시다”라고 노래한 시는 신비와 경건함으로 인해 다분히 종교적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후 쓴 시편들이 대개 그러한데, 그 무렵 그는 인도의 시성으로 알려진 타고르에 심취했었음을 고백한바 있습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 어리광함같이/내가 이 잔디밭 위에 짓둥글 적에/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참으로 보아 주실 수 없을까”(시 <봄 잔디밭 위에> 부분) 하는 시구에서도 보이듯이 ‘어머니’는 그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로 보입니다.

“우리는 보들레르가 될 수 없으며 타고르도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것만 쓸데없이 흉내 내지 말 것이다. (…) 우리는 먼저 산비탈길로 타들며 지게목발 두드리어 노래하는 초동에게 향하여 들어라. (…) 조선혼의 울음소리를 거기서 들을 수 있다.”― 이 글은 조명희의 시집 《봄 잔디밭 위에》의 서문인데, 조선 민중의 삶과 정서에 바탕을 둔 그의 시관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조명희는 소설가로 알려진 사람인데 시 얘기만 했습니다. 그는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요[東洋] 대학에서 유학했습니다. 이 무렵 조명희는 극작가 김우진과의 만남을 계기로 <김영일의 사>, <파사> 같은 희곡을 쓰고 순회공연을 갖는 등 민족극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시를 처음 발표한 것이 귀국 후 1924년이니까 그보다 먼저 희곡작가로 두각을 나타낸 셈입니다.

그 후 1925년 《개벽》지에 소설 <땅 속으로>를 발표하며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땅 속으로>는 동경유학을 마친 주인공이 겪는 생활의 궁핍과 절망에 대한 자의식을 그리고 있으며, 작품의 배경은 ‘나’의 고향인 농촌과 인구 20만~25만 가운데 빈민이 18만이나 된다는 당대의 서울입니다.

이러한 처참한 사회현실을 바탕으로 한 초기 단편은 당시 프로문학 자연발생기에 주목받는 소설이었음은 물론입니다. 조명희가 비로소 ‘현실’과 조우한 셈인데요, 초기의 종교적 심성과 과도한 절망의식이 당시의 급박했던 현실에 별다른 대안이 되지 못함을 자각한 것입니다.

1927년 발표한 그의 대표작 <낙동강>, 당신도 혹시 읽어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을 백정 중심의 형평사 운동과 계급투쟁 전선에 등장시킴으로써 새로운 리얼리티를 획득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 <낙동강>의 배경은 낙동강 하구 마을인 부산의 구포인데, 한때 대단한 위세를 가졌던 나루로 알려진 곳입니다.

당연히 등장인물은 경상도 방언을 쓰며, 작품 속에는 경상도 지방의 노래들도 삽입되어 있습니다. 사회운동이라는 다소 생경한 이념과 주제를 다루었는데도 이 작품이 주목받는 것은 그러한 향토적 실체, 한국적 상황을 작품 속에 용해시켜 민족사적 차원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빈농의 아픔을 고발하는 신경향파 문학을 벗어나 자각적인 개혁의지를 갖는 문제적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프로소설의 선구 역할을 했으니 문학사적 의미도 적지 않습니다.

▲ 2015년 5월 벽암리 수암 마을에 개관한 포석 조명희 문학관.

일제가 치안유지법을 공포하고 사상운동 관련자 등 지식인 검거에 혈안이 되자, 1928년 조명희는 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우수리스크 육성촌 등지에서 조선어와 문학교사로 활동하며 산문시 <짓밟힌 고려>와 장편소설 <붉은 깃발 아래서>를 썼고, 하바로프스크로 이사한 후 장편소설 <만주의 빨치산> 들을 발표하며 재외 항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37년부터 세계 이민사상 유례가 없는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라는 광풍이 고려인들을 휩쓰는 가운데 조명희는 일본 간첩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소련 헌병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현재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에 마련된 ‘고려인 역사관’에 ‘항일투쟁 영웅 59인’ 중 한 명으로 전시돼 있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있는 문학박물관에는 ‘조명희기념실’이 조성돼 있으며 ‘조명희 거리’도 명명돼 있다 하니,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에서 고려인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인정받는 그의 위상을 짐작할 만합니다.

국내에서 조명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할망정 항일 지사로서의 면모나 프로문학의 선구자적 위치는 확인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충북 지역에서 가장 최근에 개관한 조명희 문학관의 전시 내용을 보면 연구 성과보다 문중의 일방적인 추앙이 앞서가는 듯해 민망합니다.

최초의 시집, 프로문학의 금자탑 등등 아전인수 격 미사여구를 앞세운 설명을 보고 듣는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문학적 위의(威儀)는 한두 사람의 주장으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학계의 폭넓은 동의와 함께 사회적 합의도 있어야 자연스럽고 위엄도 빛나는 게 아닐까요? 이를테면,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는 발표했던 작품을 묶은 것인 데 반해 조명희의 시집은 ‘거의 미발표’ 작품이므로 최초의 시집이라니, 이런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적잖이 당황스럽습니다.

조명희 가족의 강제이주 과정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그의 문학 업적과 어떤 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인지도 얼른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전시된 후손들의 활동사진도 그러하려니와 양주 조씨 가계도 앞에서는 정말이지 난감합니다. 그러지 않더라도 크고 높은 인물을 ‘가문’ 안에 가두어 왜소하게 만들고 있는 듯해 안타깝고,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공간이 또 줄었다고 생각하니 다시 우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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