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많은 가르침을 주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김상수 충북재활원장

▲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향연 플라톤 지음. 왕학수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눈은 펼쳐진 사물을 모두 담지 못합니다. 인간의 인식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 단위라는 나노미터를 안다 해서 무한대를 헤아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경전들은 진리가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다는 표현을 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인식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단단히 고착된 채 붙잡고 있는 인식의 틀을 놔버렸을 때라야 비로소 진리가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신 일화는 단지 마술과 같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생물학적 범주를 넘어서는, 무한의 세계에 대한 부분적 현시입니다. 무한대인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펼쳐지는 한계 없는 세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그 ‘실재’에 대해서 우리는 확언할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오류를 ‘실재’로 믿고 사는 어리석음의 역사를 반복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여전히 대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세상만물을 읽는 척도가 되어 스스로 가치판단의 기준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소하고, 단편적인 지배자에게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진리는 핍박받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들은 무지하고 오만하며, 수치를 모릅니다. 그 오만과 수치는 여전히 대중의 지지를 받습니다.

계급논리 앞에서, 진리는 무기력해보이기만 합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지배계급을 불편하게 만드는 소크라테스의 당당함을 그들은 죄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람을 현혹시키고, 다른 신을 믿는다며 불편해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신은 주문하는 대로 분절된 사회를 고착시켜주고, 대대손손 권력을 보호해주고, 그들의 판단을 지지해주는 신입니다. 이러한 질서를 벗어나면 신의 응징이 내려집니다. 기득권자의 응징이 곧 신의 응징입니다. 모두가 생각하는 대로, 사는 대로, 시키는 대로 살아야한다는 주문이 신의 법칙인 양 대중은 두려움에 갇히고 마는 사회가 됩니다.

신앙의 모범답안 같은 소크라테스

죽고 죽이는 전쟁과 야만의 시간을 목도하고도 의문이 없었던 대중들은 진리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자신이 곧 자기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기저에 깔린 두려움을 넘어섰습니다. 지혜(진리)가 이끄는 대로 살았기에 인간이 내리는 죄명과 사약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진리의 실종이 아니라, 진리의 확언이며, 부활이 되어 2500년을 이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필리4,7)라고 표현된 성서의 표현은 글 속에 섞여 놓쳐버렸던 말씀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민중의 어리석음을 묵상하며, 진리는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는 오랜 이 성서의 가르침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간절하고, 진실하게 법정에서의 변론만을 남긴 채 저항 없이 목숨을 내려놓았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진리를 시종일관 그렇게 묻고, 대답하며 다닐 수 있을까? 자신을 이해 못하는 대중에게, 그리도 성실히 진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삶만으로, 다른 이들이 깊은 존경과 진리에 헌신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손만 뻗으면 취할 수 있는 권력과 부와 명예와 쾌락 앞에서도 온전히 진리만을 논하는 그 기쁨을 나는 살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진리이신 하느님을 어떤 자세로 믿고 따라야하는지에 대한 부끄러움과 안이함을 성찰하게 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철학자가 아니라 신앙의 모범 답안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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