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흘러가는 세월도 다 씻어 갈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17)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보탑사 전경. 1996년 완공된 통일대탑은 쇠못 하나 쓰지 않고 재현한 삼국시대 목탑 형식이다.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에 속합니다. 그러나 즐거움 대신 실망감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음을, 정송강사를 나오며 깨닫습니다. 즐거움을 주는 것이든 실망감을 안겨주는 것이든 한번 알고 난 후에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나 또한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나는 전과 같은 사람일까요? 당신이 옆에 있다면 어떤 말로 나를 위로해 줄까 생각해 봅니다. 조명희와 조벽암의 자취를 찾아 가야 하는데, 번뇌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잣고개 아래에서 길을 바꿉니다. 절로 가는 마음이 그런 것일까요?

사석리에서 천안 방향으로 가다가 초원휴게소 사거리에서 두 시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김유신 탄생지가 있는 상계리 계양마을의 담안밭을 지납니다. 연곡저수지를 지나 연곡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통일대탑 보탑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92년 대목수 신영훈을 비롯한 여러 장인들이 참여한 불사를 시작해 4년 공사 끝에 완공한 통일대탑은 약 43m의 높이에 3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쇠못을 하나도 쓰지 않은 순수한 목조 건물이며, 황룡사 9층 목탑 이후 1300년 만에 재현된 삼국시대 목탑 형식이라 하여 애초부터 화제가 되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불가에서 탑은 곧 사리(유골)를 안치한 무덤을 말합니다.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은 땅으로 내려간 찰주 아래서 사리가 확인됨으로써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보탑사 통일대탑은 탑이 아니라 탑 형식을 빌린 목조 건물입니다. 즉 겉모습은 탑이지만 각 층마다 법당인 다층집이고, 내부로 들어가 계단을 통해 3층까지 올라가 연곡리 주변의 자연경관을 시원하게 둘러볼 수도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보는 느낌, 당신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죠. 풍경화로 다가오는 세상에는 어떤 번뇌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이지 사람들이 작아져서 그 움직임이 사소해 보입니다. 거울에 비춰진 세상을 상상해 봅니다. 바람 불고 번뇌로 들끓는 이쪽과 바람도 소리도 없이 평온한 거울 속, 어느 쪽이 진짜이고 궁극일까요.

▲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연곡리 석비.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白碑)라고도 불린다.

말의 부질없음, 연곡리 백비(白碑)

연곡리 석비(보물 제404호)를 들여다봅니다. 보탑사 한편에 있어 절에 속한 것으로 보기 십상이지만 보탑사와는 무관합니다.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인데, 비문이 없어 일명 백비(白碑)라고도 불립니다. 아, 백비라니! 어떤 사연일까요? 새겨야 할 말은 산같이 겹겹이요 강같이 길건만 다 새길 방도가 없으니 아예 새기기를 단념한 것일까요? 새길 수도 없고 새기지 않을 수도 없는 비문, 가장 길기도 하고 가장 짧기도 한 비문을 담고 있는 이 비야말로 진정 시비(詩碑)가 아닐까요? 무엇을 자랑하지도 않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 백비 앞에서 말의 부질없음을 생각하며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길을 되돌아 나와 사석삼거리에서 다시 머뭇거립니다. 잣고개를 넘으면 바로 진천 읍내이건만, 좌고우면 끝에 청주 방향으로 길을 잡습니다. 아무래도 문학유적을 돌아보는 일에 흥이 일지 않으니 농다리나 보고 돌아가자는 심산입니다. 농다리는 문백면 구곡리 앞 세금천에 놓인 옛 다리입니다. 원래는 교각 28칸에 길이가 100m가 넘었다고 하나 지금은 교각이 양쪽으로 2칸씩 줄어 24칸만 남았고 이에 따라 길이도 94m 정도입니다. 작은 낙석으로 다리를 쌓은 방법이나 다리가 숱한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 고종 때 임연 장군이 어느 겨울날 아침에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는데, 건너편에서 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려 하는 것을 보고 사정을 물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에 가는 길이라 하였답니다. 여인의 지극한 효성을 딱하게 여긴 임 장군이 즉시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하루아침에 다리를 놓음으로써 부인이 발을 적시지 않고 내를 건너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상산지》와 《조선환여승람》 등의 문헌에는 ‘군 남쪽의 세금천과 가리천이 합류하는 굴치(屈峙)에 있는 다리로서 900여 년 전인 고려 초기에 임씨의 선조 임 장군이 처음 건축한 것’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서 ‘임 장군’은 고려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운 임희로 추정되는 바, 다리는 이 일대 호족세력이었던 임씨 족단(族團)에 의해 건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농(籠) 자는 ‘대그릇’이란 뜻입니다. 그것처럼 얼기설기 얽었다 하여 ‘농다리’라고 부른 것인데, 장마 땐 물이 다리 위로 넘어간다 하여 수월교(水越橋),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지네가 물을 건너가는 것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지네다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문백면 구곡리 세금천에 놓인 농다리.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로 꼽힌다.

농다리, 수월교, 지네다리

“그때 물 건너 저편에 서서/누가 손짓을 했기에//이 짐승은/천년 동안 물을 건너가는가.//그네에게 닿는 길은 멀고도 멀어서/이제 가까스로 기슭에 머리를 올려놓았는데//애초 헛것을 잘못 보았는지/거기 서서 홀리던 이는 자취가 없고//다시 한 천년 발을 적시면/구름 같은 손짓을 한번 볼 수 있을까//눈도 없이 애가 단 짐승은/물에서 나도 들도 못하는데//한 번 사랑에 한 생애가 저무는 거라고/발아래 물이 크게 한번 웃고 멀어져 가는 동안//속도 겉도 다 타서 검은 짐승의 등을 밟고/그리움의 통증도 없이 나는, 천년을 오가는가.”(졸시 <지네다리를 건너다> 전문)

돌다리 위에 앉아 물을 바라봅니다. 참 무심하게도 흘러갑니다. 애증이 없으니 미련이 있을 리 없고, 한번 흘러가면 되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물처럼 흘러간다 해도 사람이 지은 업은 떠내려가지 않고 돌 위의 물이끼처럼 남아 뒷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권세를 빌리고 천금을 들여 돌을 깎고 새겨 치장을 해도 얼룩을 다 덮을 수는 없습니다. 옛사람의 생애를 읽는 것은 그를 탓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마침내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귀결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이치를 곱씹으며 앉은 물가,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날이 저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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