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본성에 매달리는 소설가 정유정의 <종의 기원>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이연호 꿈꾸는책방 대표

▲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펴냄.

소설 <종의 기원> 작가 정유정의 말을 끝으로 책장을 덮었다. 저자의 염려처럼 ‘즐겁지 만은 않은 여정’이었다. 앞 문장과 뒤 문장을 순차적으로 읽어내지 못했다. 문장들이 시차도 없이 뜨거운 것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탓에 눈을 감아 피하는 것조차 생각해내지 못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깊고도 긴 숨을 토해냈다. 마침내. 숨 쉬는 것조차 잊었을까 싶을 때쯤, 화석 같은 숨덩이 하나가 울컥 올라왔다. 그 끝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딸려왔다. 뜬금없는 일이었다. 어떤 의미의 ‘다행’이었을까? 안도감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불편한 안도의 숨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책을 집어 든 순간부터 덮는 순간까지 오로지 당겨지는 것만으로 긴장이 부풀려져 온 것은 사실이다. 작가의 문장처럼 ‘손톱 끝으로 툭, 치기만 해도 와르르, 부서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팽창된’ 상태에서 책을 읽고 있었으니 약간의 이완 정도는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다행’이다 싶은 이 불안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 더는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되어서? 혹시라도 이어질지 모르는 잔혹한 이야기를 더는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비겁함?

이미 두 남자(아버지와 형)가 죽었다. 세 여자의 목이 날카로운 면도날로 베어졌다. 벌어진 틈으로는 그녀들의 삶이 뭉텅이로 식었다. 다시 한 남자가 물에 빠져 안간힘을 썼지만 살아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도 살인자는 1년의 세월을 건너 ‘자박자박’한 발소리가 소란스러운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마지막 문장은 살인의 예감과도 같은 ‘피 냄새’가 ‘훅 밀려왔다’고 마무리되고 있지 않은가. 여기 어디에 ‘다행’이 남아 있는가? 안도의 한숨이라니?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반응이다.

마지막 남자의 마지막 숨을 현장에서 들려주지 않아서일까? ‘면도날’의 섬뜩함이 아닌 익사의 형태여서일까? 인류의 2~3퍼센트 가량이 사이코패스라는 ‘악’의 보편적 민낯을 더 이상은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외면인가?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한다는 ‘프레데터’ 즉 ‘순수 악인’의 만행을 더는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비겁함인가? 어처구니없는 이 반응에 나는 다시 어처구니없어졌다.

며칠 전에 봤던 영화를 떠올렸다. 곡성(哭聲)이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서며 목덜미를 더듬어 내리던 기억이 난다. 가늘고 끈적거리는 거미줄 같은 것이 뒷목에 걸려 짜증을 만들어냈다. 불쾌했다. 무엇보다 ‘악’의 근원을 살피는 감독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는 ‘불신’을 악의 기원으로 삼았지만 나는 ‘의심’을 삶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악’에 대한 다른 생각을 찾아보고 싶던 참이었다. “악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라는 문장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종의 기원> 뒷날개에 박혀있었다. 단숨에 읽었다. 숨을 쉬지 않고 읽었다고 해야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그리고 얻은 생각이라서 ‘다행’인가? 여하튼 ‘악’을 다루는 작가 정유정의 태도는 엄정하고 단호했다. 좋았다. 오래 묵은 것에서 풍기는 세련된 솜씨도 좋았다.

작가가 ‘악’에 관심 갖는 이유는?

정유정이 ‘악’에 대한 의문과 의심을 품고 작품으로 써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꽤나 오래된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한다는 ‘순수 악인’인 ‘유진’을 키워 온 이력을 살펴보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선 정아의 아버지로, <내 심장을 쏴라>에선 점박이로, <7년의 밤>에서는 오영제로, <28>에서는 박동해로 등장시켜 ‘유진’의 목소리를 다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다른 악인을 등장시키고 형상화시켰으나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오히려 점점 더 목이 마르고 답답했다”고도 했다.

그는 정말 한 순간도 ‘유진’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랜 숙성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녀는 채워지지 않았던 갈증의 원인을 찾아낸다. 이유는 “그들이 늘 ‘그’였기 때문”이었다. 외부자의 눈으로는 늘 부족했던 것이다. ‘악’의 존재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악’의 시선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 번을 다시 썼다고 했다. 이야기 자체를 세 번씩이나 부수고 다시 썼다는 집요함에서 ‘악’의 민얼굴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싶은 작가의 열망이 느껴진다.

건너다보는 시선 안에서 ‘악’은 늘 타인의 것이다. 내게는 없는 어떤 것이어서 누구도 내 삶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발견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악’의 시선으로 ‘악’을 보는 순간 거기엔 다름 아닌 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내 삶과 욕망 안에 일정한 수위로 담겨 있는 ‘악’의 실존을 마주하게 된다. 이를 인정하는 순간에 이르러야 비로소 ‘악’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 가능성을 통해서만 화해와 공존의 여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정유정이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들어보자.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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