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평사리, 평사십리 모래밭 존재…평사낙안(平沙落雁)으로 불려
모래강은 거대한 정화필터…소두머니 전설 싣고 맑은 물 내려보내

▲ 경북 예천 회룡포 못지 않은 절경을 자아내는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 절경. 용이되지 못한 소두머니의 이무기 전설이 전해져 온다. 사진/육성준 기자.
▲ 진천 미호천 농다리. 사진/육성준 기자.
▲ 평사십리라 불렸던 10리길 백사장. 평사낙안의 정취가 남은 곳. 미호천에서 유일하게 레프팅을 할수 있는 곳이다.사진/육성준 기자.
▲ 지금은 사라진 1970년대 미호천 미루나무. 사진/김운기씨 제공
▲ 청주시 신대동 건녀편 미호천 모래사장. 작천보가 물을 채운 이후 유일하게 남아있는 백사장이기도 하다. 사진/육성준 기자
▲ 초평저수지 한반도지형. 초평저수지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 소두머니의 용이되지 못한 이심이의 마음을 달래는 듯 하다. 사진/육성준 기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전형적인 모래강이었던 미호천의 백사장이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20여년전 청주시민의 피서지였던 오창 팔결교 백사장은 온데 간데 없다. 모래를 대신해 진흙 뻘이 자리잡았다.

둔치에 있던 모래도 사라졌다. 푸석푸석한 흙들이 먼지를 날리고 아카시 나무도 자리를 잡았다. 작천보를 중심으로 상류인 팔결교 까지는 거대한 호수로 변했다. 여천보에서 은탄리 사이도 물 흐름이 정체된 호수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강속의 녹색댐. 자연정화제라 불리던 모래사장은 미호천 중상류인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에 다다라서야 나타났다.

은탄리에서 평사리, 농다리로 이어지는 구간의 모래사장과 절경은 여전했다. 평사십리. 우담제월, 소두머니와 같은 각종 전설과 설화가 과장은 아닌 듯했다.

하류지역은 처참했다. 작천보에서 강외면 지역까지 모래사장의 원형을 간직한 곳은 딱 한 곳에 불과했다.

모래강이었던 미호천의 원형이 바뀌고 있는 사이 미호천에 대한 개발이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수상레저 타운 건설을 공약했던 변재일 의원, 15m에서 20m 깊이로 준설해 유람선을 띄우자는 의견 등 각종 개발 청사진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다. 관계기관의 행보도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청주시는 지난 6월 1일 미호천·무심천 친수공간 조성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 착수보고회를 열고 개발계획을 세우고 있다. 충북도도 마찬가지다. 지난 4월 ‘미호천 개발 프로젝트’를 두 차례 진행하고 의견을 수렴했다.

‘개발이냐! 모래강 보전이냐’ 갈림길에 선 미호천의 생태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조명해본다.

평사낙안(平沙落雁). 드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위에 기러기가 내려앉은 풍경을 보고 선조들이 표현한 말이다. ‘평사리’는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경남하동 최참판댁이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 아래로 넓은 들과 섬진강이 일궈 놓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있다.

미호천 중상류 지역인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이곳에는 평사마을이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평사리라 부른다. 진천지역의 명승지 8곳을 표기한 조선환여승람에서는 이곳을 ‘평사낙안’이라 표현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 평사리부터 아랫마을인 은탄리에 이르는 지역의 모래사장을 평사십리라 불렀다.

오경섭 교원대학교(지리학) 명예교수는 미호천의 특징으로 모래강을 꼽았다. 오 교수는 “미호천 유역에는 높은 산은 없지만 화강암이 풍화된 마사토가 주를 이루고 있다”며 “비가 오면 쓸려 내려가 미호천 유역에 끊이 없이 모래를 공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래가 많은 미호천은 곳곳에 백사장을 만들어냈다. 이중 제일 아름다운 곳은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 소두머니 지역. 이곳은 뱀처럼 물길이 휘어와 다시 한번 크게 휘돌아 가며 드넓은 백사장을 만들어 냈다. 한눈에 봐도 경북 예천의 회룡포 못지 않다. 송태호 청주삼백리대표는 이 지역은 “농다리부터 은탄리 구간이 미호천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정점을 찍는 곳”이라고 말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조선환여승람은 이곳의 비경을 우담제월(牛潭霽月)로 표현했다. 은탄리에서 여천보 방향으로 흐르는 물에 비친 달을 절경으로 꼽은 것이다. 이 지역은 ‘갈(葛,칡)궁저리’ 혹은 ‘소(牛,우)머니’라 불린다. 이곳에는 용이 되지 못한 이심이(이무기:용이 되려다 못되고 물속에 산다는 여러 해 묵은 구렁이) 전설이 전해온다. 산에서 30년, 물에서 30년을 산 구렁이가 용이 되려고 하늘로 승천하려 하는데 이를 본 임산부가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부정을 타 이심이가 되었단다. 해질 무렵이면 이곳을 지나던 나그네의 옷깃만 물에 떠오르고 칡넝쿨로 소의 머리를 감아 매 물가에 내놓았더니 소머리만 남았다. 마을 사람들은 소머리만 남았다 해서 ‘우두머리’ 불렀고 뒤에 ‘소두머니’가 되었다. 소두머니 윗 지역에는 충북학생종합수련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 백사장 강가에서 아이들은 레프팅을 즐기고 있다. 소두머니 옆에는 이심이의 한을 풀어주듯 용의 형상을 한 초평저수지가 있다.

모래강인 미호천의 백사장도 작천보가 물을 가두면서 하류지역은 특성을 잃어가고 있다. 한 때 청주시민이 여름철 피서지로 즐겨찾던 오근장 팔결다리 백사장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바닥은 모래대신 진흙 뻘이 자리잡았다. 저멀리 하류 작천보에서 가두어진 물은 이곳까지 차올라 거대한 호수처럼 변했다. 송태호 청주삼백리 대표와 함께 은탄리에서 여천보를 지나 까치네까지 돌아 봤지만 백사장은 사라지고 육상화가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작천보가 물을 채우기 전 항공촬영한 사진에는 미호천 전역에 백사장이 펼쳐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갈퀴로 모래무지를 긁었어”

모래강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을 무렵 미호천은 맑은 물과 더불어 모래무지와 같은 물고기로 유명했다. 1급수와 모래밭에만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미호종개, 모래무지등 수십종의 물고기가 미호천에 서식했다.

미호천이 맑은 물을 유지할수 있었던 비밀에 대해 오경섭 교원대 명예교수는 첫째 이유로 ‘모래강’을 꼽았다. 오 교수는 “모래강은 오염물질을 다 여과해서 하류로 내보낸다. 퇴적해 있는 모래는 모래와 모래 사이에 수많은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이 미생물이 서식하며 물을 정화한다”며 “심하게 오염된 물도 모래강 5km를 내려가면 1급수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청주 80만 인구가 쏟아내는 오염물질을 받아 들이는 미호천이 이 수질을 유지하는 것은 모래강이기 때문”이라며 “모래강은 자연이 내려준 정화필터”라고 말했다.

청주권역의 미호천에서 백사장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가운데 청주시 신대동에 길이 300여m 정도의 백사장이 남아있었다. 1km정도 상류인 작천보의 물이 검녹색을 띠며 탁했지만 이곳 모래톱과 주변으로 흐르는 물은 1급수처럼 맑았다.

신대동 경로당에서 만난 김애자 할머니는 “예전에는 이곳 전부가 백사장이었다며 갈퀴로 모래를 긁어서 모래무지를 잡았다”고 말했다. 이어 “한번에는 아들이 담임선생님과 친구 40명을 데리고 왔다. 아저씨가 나가 한 시간 만에 40명 어죽을 끓이고도 남을 고기를 잡아왔다”고 말했다. 백사장의 맑았던 물도 뻘처럼 바뀐 하류 지역에서는 맑은 빛깔을 잃었다. 미호천 하류 RC연습장 인근 하류의 물은 멎어있다고 착각될 정도로 유속이 느렸다. 바닥은 진흙 뻘이 차지했고 물은 탁했다.

 

포플러장학회와 미루나무 숲

1978년까지 37번 국도 미호천 철교 하류 미호천 둔치에는 미루나무 숲이 있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이곳에 1만2000그루의 미루나무가 심어졌다. 당시 미루나무 숲은 청주의 명소가 돼 노래자랑이 열리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소가 됐다. 하지만 하천 범람을 이유로 1978년 벌목됐다. 이때 청원군은 나무를 판 대금 1억1000만원을 종잣돈으로 ‘청원군포플러장학회’를 발족했다. 기금 이자로 2013년까지 34년간 1840명에게 총 4억6841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다 지난해 청산됐다.

 

 

미호천 유역은 거대한 선사유적 박물관

오송 만수리는 한국최고(最古) 50만년전 구석기유적지

진천·청주권역만 30여곳 발굴…박물관 하나 없어 ‘대조’

 

미호천 유역은 거대한 선사유적 박물관이었다. 진천군 지역과 청주시 지역에만 20여곳의 구석기,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됐다. 고인돌과 선돌, 청동기등 청동기시대 유적도 10여곳에서 발굴됐다. 이중 오송 만수리 지역유적은 50만년전으로 연대가 측정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으로 평가됐다.

1991년 미호천 여천리 증평IC 인근 미호천 구릉 수천평 규모의 홍적세층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몸돌쌍날 찍개, 긁개, 밀개, 망치돌 등 유물이 발굴됐다. 미호천 하류인 금강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됐지만 미호천 유역에서 발견된 것은 여천리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93년 오송 만수리 미호천변 돌다리 방죽 구릉지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이 대량 발견됐다. 당시 발굴을 진행한 한국서원학회는 미호천변에서 1㎞ 정도 떨어진 만수리 일대 수만평의 구릉지 붉은 찰흙층(제 4기 홍적토) 등에서 찍개‧긁개‧주먹도끼‧주먹도끼자르개‧사냥돌‧몸돌을 발굴했다.

만수리유적 발굴을 주도한 이융조(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충북대 명예교수는 “미호천 유역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 사람이 살기가 좋았다”며 “만수리 유적은 연대측정된 것만 50만년이 넘는 곳”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일본과 프랑스 등 여러 국가의 교수들이 참여해 연구한 결과 과학적 연대측정으로 50만년이 나왔다. 프랑스 연구진들은 70만년전으로 보기도 했다”며 “이곳에서 발굴해 국가에 귀속된 유물만 9300점”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단일 지역으로 이렇게 많은 곳은 드물다”며 “하지만 발견된 유물을 전시할 곳 도 없는 실정이다”며 “진천 송두리 유적은 보전도 못하고 발굴 터를 덮어 버렸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미호천 유역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유물이 엄청나게 발견된다.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이를 체계화해 역사유적 박물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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