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수리 45년…정필목 씨의 둥그런 ‘바퀴인생’
윗방 털어 만든 세 평 ‘내수자전거’는 동네 사랑방

토박이 열전(8)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내수자전거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과 용암동을 가르는 영운천이다. 지금은 용암동이 훨씬 큰 동네인데 왜 영운천이 됐는지 궁금할 것도 없다. 1990년대 택지개발 전까지 용암동에는 온통 언덕과 논밭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로 게딱지처럼 낮은 지붕을 얹은 집들이 옹기종기 흩어져 있었을 뿐이다. 1975년 개교한 청석고등학교 자리에는 청주대 재단의 사업밑천이던 빨간벽돌 공장이 있었다.

내수자전거는 그 청석고 학생들을 보고 1980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내수자전거일까? 알고 보니 1980년 3월 청주시(당시 청원군) 내수읍에서 개업한 뒤 불과 7개월 만에 현재의 자리로 가게를 옮긴 것이다. 그로부터 36년이 흐르는 동안 바뀐 것은 없다. 가게 이름도 간판도, 주인장도 그대로다. 20대 중반이던 정필목 씨가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 말고는….

“그때는 자전거포가 허가제였어요. 고물상 6종 허가가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내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어요. 일단 문을 열고 바로 이리로 온 거죠. 용암동로 50, 여기가 내가 태어난 집이에요. 평생을 이 집에서 살았어요. 가게가 세 평은 되나? 이 지붕도 뼈다귀라고 하는데 나무에 흙 바른 윗방 뜯어서 가게 만든 거예요.”

1980년이면 정필목 씨가 24살 때다. 자동차는 정비사 자격증이 있다지만 자전거를 고치는 기술은 어떻게 배웠을까?

“어릴 때 먹고살기 위해서 배운 거죠. 기술만 있으면 굶지는 않는다고 했으니까. 국민학교 졸업하고 바로 배웠어요. 청주에 자전거포가 많아서 여러 군데 돌아다녔어요. 진짜 기술은 오정목(五丁目, 왜식지명)에 있던 자전거포에서 배웠죠. 기술을 배운다고 해야 시키는 대로 하고 어깨 너머로 배우는 거였죠. 그렇게 기술도 가르쳐주고 돈도 줬는데 첫 월급이 500원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9년여를 남의 집 일을 해주다가 24살에 자전거포의 쥔장이 됐다. “평생 큰돈은 만져보지 못했다”는 정 씨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개업 이후 36년 동안 자신이 기술을 배울 때처럼 점원을 둔 적이 없다니 말이다. 1980년에 문 열고나서 한 3년 장사가 됐다고 했다. 그런데 오토바이가 나오고 나서 한물갔다고도 했다. 무엇보다도 정 씨는 예나지금이나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쭉 혼자 했어요. 하는 일도 달라진 게 없고 빵꾸(펑크) 때우고, 타이어 주부(튜브) 갈고, 브레끼(브레이크) 고치고…. 옛날 하고 똑같아요. 그냥 일반 생활자전거만 고치는 거지, 고급자전거나 MTB는 못 고쳐요. 그런 거 고치려면 기술도 기술이지만 연장이고 뭐고 다 새로 준비해야 하니까.”

하긴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제 자전거가 아니라 바이크다. 산악용 바이크는 약자로 ‘MTB’라고 부른다. 손으로 잡는 브레이크가 없는 ‘픽시’가 있고 접는 자전거 ‘브롬톤’도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가게 문을 여는 시간이다. 옛날에는 새벽 6시에 문을 열어서 밤 9시, 10시까지 손님을 받았다. 지금도 연중무휴라고는 하지만 오전 8시30분쯤 문을 열어서 오후 6시면 일을 마친다. 2000년 초부터 성당을 다니기 시작해서 일요일에는 오후에나 문을 연다. 그마저도 손님이 없을 상 싶으면 여는 둥 닫는 둥 할 때도 있다. 경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10여 년 전부터 아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정 씨는 애들 어릴 때야 돈 나갈 일이 없지만 10년 전부터는 돈 들어갈 일이 많았다고 했다. 정 씨는 지난해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과 함께 세 식구가 살고 있다.

정 씨는 중고자전거를 팔지 않는다. 중고자전거를 팔려면 부지런히 매입도 해야 하는데 장물이 많기 때문이란다. 여기에다 단골들이 새 자전거를 사면서 헌 자전거를 기증하는 경우도 있단다. 그러니 한두 대씩 얻은 것은 단골들이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짜로 준단다. 중고자전거가 풀리면 나중에 수리비라도 벌게 되니 손해 볼 게 없다는 논리다. 큰돈 벌 욕심은 없고 되나 안 되나 붙잡고 있는 거라니 납득은 가지만 장사꾼의 잇속은 도통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 단골들이잖아요. 인심 잃으면 안 되죠. 36년 전 문 열 때부터 오시는 분도 있어요. 윗동네를 점촌이라고 하고 여기는 중흥부락이라고 했는데 그때 친구들, 아버님들…. 쭉 오시다가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멀리 이사 가서도 오시는 분들이 있으니까, 고마운 거죠.”

지금은 자전거포만 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마을일도 봤다. 통장 17년, 새마을지도자 15년이라니 마을에 일꾼도 이런 상일꾼이 없었을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내수자전거는 지금도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한다. 다만 어느덧 이야기꾼들도 늙수그레한 초로의 남성들이거나 호호백발이 됐다. 자전거포가 쥔장과 함께 늙어가는 셈이다.

옛날에는 인스턴트커피가 남아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쫌 덜하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전차의 시대가 가고 신사용자전거마저도 낯설어진 지금, MTB와 픽시, 브롬톤의 시대에 내수자전거가 매일 같이 문을 열고, 손님을 받고,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그것이 내수자전거의 생명력이자 정철목 씨의 저력이다. 36년 동안 세 평 가게를 고수했고, 중고자전거를 나눠주기도 했으며, 펑크를 1000원 싸게 때워온 일관됨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은 둥근 자전거바퀴를 닮았다. 커피 한 잔 하자는 걸 바쁘다며 뿌리쳤다. 기름때 묻은 거친 손으로 타주겠다는 그 봉지커피를 맛보지 않고 돌아선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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