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땅에 얽힌 옛이야기, 그 속에 깃든 문학의 원형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15)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진천으로 향합니다. 진천 하면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당신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줄 압니다. 그 말은 본래 ‘사거용인(死去龍仁)’이란 말과 같이 쓰였습니다. 뜻인즉 살아서는 진천에 살고 죽어서는 용인으로 갔다는 것인데, 살기는 진천이 좋고 죽은 후에는 용인이 좋다(死後龍仁)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 살기 좋은 고장 ‘생거진천’을 알리는 광고판. 홍보물은 때에 따라 달라져도 ‘생거진천’이란 말은 빠지지 않는다.

용인 땅이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산세가 순후하여 예부터 권문세가의 산소가 많기에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만, 오늘날 신도시 개발로 수도권 사람들의 대표적인 주거지가 되다시피 한 용인에서는 잘 쓰지 않는 반면, 진천군에서는 ‘생거진천’만 떼다가 아예 자치단체를 홍보하는 수식어로 쓰고 있으니 사뭇 대조적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회자돼 온 말에 이야기가 없을 리 없죠. 옛날 진천에 사는 허 생원의 딸이 경기도 용인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다가 남편을 여의고 말았습니다. 잇따라 시부모마저 죽자 허씨는 진천으로 개가를 하여 또 자식을 낳고 살다가 늘그막에 다시 홀로 되었습니다. 이때 용인에 사는 아들이 장성하여 찾아와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해서 진천에서 함께 살던 아들과 시비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소장을 받은 원님은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 하였으니 너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진천에서 살도록 하고 죽은 뒤에는 용인에 모시도록 하여라.”고 판결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살아서는 진천에서 살고 죽은 뒤에는 용인으로 간다는 말이 생겼다고 하는데, 내용으로 보아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은 이미 세간에 퍼져 있었던 듯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전설로서 삶과 죽음의 질서를 넘나드는 기막힌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오늘은 옛날얘기만 하다가 날이 저물겠군요.

옛날 진천 땅에 살던 추천석이란 사람이 갑자기 죽어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 엎드렸습니다. 이승에서의 삶을 심판받는 자리였겠죠. 거주와 성명을 물은 염라대왕은 진천에서 온 추천석이란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였습니다.

용인에 사는 추천석을 불러들였어야 하는데, 저승사자들이 실수하여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똑같았던 것입니다. 염라대왕은 진천의 추천석을 즉시 풀어주고 용인의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다시 명을 내렸습니다.

생거진천에 얽힌 두가지 전설

어차피 이승의 중생들이 아는 것도 아닐 테고, 다른 추천석도 데려와서 대강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은데……. 하늘의 뜻을 이행하는 데는 누가 알든 모르든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공무를 집행하는 염라대왕의 자세,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덕목 아니냐고 물으면 당신은 필시 실없다고 타박을 하겠죠?

저승에서 풀려난 추천석은 이승의 자기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왔으나 이미 자신의 육신은 땅에 묻히고 없었습니다. 몸을 되찾을 수 없어 오갈 데가 없어진 그가 염라대왕에게 돌아가 사정을 호소하니, 사자의 실수로 난감해진 염라대왕은 묘안을 내어 용인 추천석의 몸을 빌려 환생하도록 조처하였습니다.

▲ 생거진천쌀 홍보용 캐릭터 쌀돌이. 진천쌀은 품질 좋기로 전국에 정평이 나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

슬프게 통곡하던 용인 추천석의 가족들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몸을 일으키자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초상집이 돌연 잔칫집으로 변한 거죠. 용인 추천석의 몸을 빌린 진천 추천석은 그 집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그대로 설명하였으나 그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들 죽음에서 깨어난 사람의 헛소리로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마지못해 하룻밤을 용인에서 보낸 추천석은 날이 밝자마자 집을 뛰쳐나와 진천을 향해 달렸습니다. 아내라는 여인과 자식들은 그런 그를 실성한 사람인양 생각하고는 붙잡으려고 뒤따라 뛰었으니, 누가 봐도 진풍경이었습니다. 추천석이 진천 자신의 집에 도착했으나 아내 역시 낯모르는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추천석은 자신의 처지를 필사적으로 설명하였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매질까지 당하고선 결국 관가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사연을 들은 고을 원님은 그야말로 명쾌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본즉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去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은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그리하여 진천 땅 추천석의 혼이 들어간 그 사내는 자기의 주장대로 진천 땅에서 생전의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고, 이후 세상을 뜨자 그 육신은 본래 용인 땅에 살았던 추천석의 것이므로 그곳 가족이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해피엔딩이라서 참 다행입니다. 읽고 나서 흐뭇하여 미소가 지어지는 이야기, 입담 좋은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 그것이 문학의 미덕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읽고 나서 슬픔과 분노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같은 맥락이 될 것입니다. 인위적인 욕망이 충돌하는 인간의 세상은 늘 위태롭습니다.

염라대왕이든 원님이든, 국가든 정부든, 공사(公事)를 다루는 일에 준엄하여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는 누군가에게 맡겨 놓고 저마다 생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것, 인간의 사회가 원하는 이상향이란 그런 수준이 아닐까요?

다스리는 힘이란 결국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그 신뢰를 잃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지요. 그것이 염라대왕이든 원님이든, 국가든 정부든 말이죠. 진천이 살기 좋은 땅이었다면 그런 믿음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넉넉한 인심, 진천쌀의 자부심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너무 명징하여 무섭다던 당신의 말을 기억합니다. 진천 지방은 예부터 토지가 비옥하고 한해와 수해가 별로 없어 농업경영이 순조로웠다지요. 그러니 산물이 풍성하고 사람들 인심 또한 넉넉하여 살만한 곳이기에 ‘생거진천’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실제로 진천은 미호천과 여러 지류가 만든 충적평야가 많아 논농사에 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32년에 편찬된 진천군의 역사책 《상산지》 ‘토산편’에는, 조선시대 진천에서 연간 6만여 석의 쌀을 생산하였는데, 당시 전국 통계가 단보당 평균 수확량이 9말 3되인 데 비해 진천은 11말 5되나 되어 곡향으로 이름이 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 명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진천쌀의 품질은 전국에 정평이 나 있고, 아예 ‘생거진천쌀’이라고 이름 붙인 쌀도 있어 소비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올해 수확한 진천쌀로 밥을 지어 기름기가 도는 것을 한 그릇씩 떠놓고 당신과 마주 앉은 밥상을 상상하며, 문백면 정송강사를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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