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말은 중국말이라고 합니다. 세계인구 60억에 중국인구 12억이니 전 인류 중 5분의1이 중국말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또 영어 역시 영미권 을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공용어로 이를 쓰고있으니 그 숫자 또한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말은 나라와 민족, 지역과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수많은 말 가운데 어떤 말은 속삭이듯 부드럽고 정겨운가하면 어떤 말은 유리알을 굴리듯 상냥하고 또 어떤 말은 싸움판의 그것처럼 거칠고 소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프랑스어로 사랑을 속삭이고 독일어로 신을 이야기하고 영어로 연설하고 러시아어로 꾸짖어라’고 말합니다. 나라말에 따라 그 억양과 어감이 듣는 사람마다 제 각기 다른 느낌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말은 억양이 아니라 내용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듣기에 감미롭고 다감하다해도 말의 내용이 그게 아니라면 의미가 반감(半減)되기에 말입니다.
말은 참으로 무소불능(無所不能)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은 ‘좋은말’ ‘나쁜말’ 에 따라 남에게 기쁨을, 용기를, 행복을 주기도 하고 슬픔과 분노와 좌절을 주기도 합니다. ‘좋은말’ 한마디는 사람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사회를 밝게 해줍니다. 그러나 ‘나쁜말’ 한마디는 남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그것이 쌓여 온 사회를 살벌하게 합니다.
일찍이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荀子)는 ‘좋은말 한마디는 남에게 비단 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善言暖於布帛·선언난어포백)’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좋은마음으로 좋은말을 해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옛 어른들은 ‘세 번 생각 한 뒤에 한마디의 말을 하라(三思一言·삼사일언)’고 일렀고 ‘좋은말은 백 마디도 모자라고 나쁜말은 반 마디도 많다’고 자식들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부질없는 말 몇 마디가 죄 없는 사람에게 치명적 상처를 주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즐거운 저녁 술자리에서조차 험담으로 일관하는 이들이 우리주변에는 흔히 있습니다. 돌을 던지는 사람은 심심풀이로 그것을 던지지만 돌을 맞는 개구리는 생사가 갈린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 마다 양·음력 두 번 새해를 맞는 덕분에 올해도 덕담(德談)깨나 주고받았습니다. 똑 같이 주고받는 인사치레이긴 하지만 그때마다 줘서 좋고 받아서 좋으니 덕담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갖게 됩니다. 사회 각 분야가 어디 한 군데 차분한 곳이 없고 보니 정초의 덕담 한마디는 그래서 더욱 값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덕담이 넘치는 사회는 좋은 사회입니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좋은마음’으로 ‘좋은말’을 남에게 건넬 때 사회는 그만큼 좋아집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처럼 ‘좋은말’을 아껴야 할까요. 말 한마디로 남을 기쁘게 해주고 그것이 모아져 사회가 밝아지는데 그것을 아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서로간에 덕스러운 말이 오고가고 그것이 봄바람이 되어 온 나라에 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옛날 태평성대 때의 덕풍(德風)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족(蛇足). 부시 미국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분단의 상징인 도라선역을 방문하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당선 뒤 줄곧 한반도 문제에 재를 뿌려왔던 그였기에 이번 방한이 우리의 통일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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