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무려 50여명을 희생시킨 미국 올랜드 총기난사 사건이 어느때보다도 무겁게 다가온다. 우리 또한 끔찍한 사건들을 연이어 겪었기 때문이다. 결코 할 얘기는 아니지만 이런 생각까지 해 본다. 만약 우리나라도 총기소지가 가능하다면 어떨까. 욱!하는 성격하면 단연 세계 최고(?)라는 한국인이지 않은가.

무고한 부녀자가 아무 까닭도 없이 화장실에 갔다가 살해되고 뒷동산에 올랐다가 대책없이 맞아죽었으니 이 정도가 되면 과거 정권에선 국가 통치차원의 무슨 조치라도 언급됐다. 그 시발점이 대통령이었을 경우 국민들이 느끼는 미더움은 더했다.

그런데 요즘은 말도 안 되는 사건이 터져도 언론에서만 요란하지 정작 국가는 없다. 국민이 가장 바라는 국가라는 요체는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주는 ‘지킴이’ 역할에 있고 이는 헌법에도 명시됐다. 세월호 사건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선 어딘지 모르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국가의 자세에 간절함이 없다. 정치적 노림수를 떠나 과거에는 ‘xx와의 전쟁' 등으로 표현되던 민생과 국민안전 차원의 국가 선전포고라도 있었다.

지난 1주일간 논란을 빚은 스위스의 기본소득 국민투표 부결 건도 그렇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국내 기득세력과 보수언론들은 복지포퓰리즘의 망조라며 일제히 열을 올렸다. 거기엔 당연히 지난 총선에서 패배한 이들의 앙갚음 의도가 엿보인다.

알려진대로 개인소득의 많고 적음, 또한 직업의 여부나 노동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회구성원들에게 국가가 균등하게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복지정책의 최고 방점이나 다름없다. 이것의 근본 취지는 소득불균형과 빈부격차, 계층불평등 등으로 상징되는 사회 양극화와 시장 및 신자유주의 폐해의 극복에 있다. 그런데 이들 세력은 단순히 퍼주기식 복지의 사망선고라며 여론을 호도했다. 국민들을 같잖게 보지 않고서야 이런 발상은 있을 수 없다.

스위스 국민들은 성인 1인당 우리돈으로 월 300만원으로 가(假)설정된 기본소득 안에 대해 현실적인 시기상조를 문제삼은 것이지 기본소득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민주국가에서 모든 사회적 제안은 두가지 장애, 즉 그 제안이 정의롭고 정당한가와 실현가능성이 있는가를 넘어서야 존립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데 스위스 국민들은 아직은 재원마련의 난맥상, 그리고 300만원이라는 높은 소득보장이 노동의욕을 저하시킬 것등을 우려해 반대표를 던지며 차후를 기약한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월 300만원의 기본소득을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면 결과는 당연히 절대적인 찬성으로 나왔을 것이다. 재원마련과 실현가능성에 대한 걱정에 앞서 소득과 신분의 양극화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현재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미 유럽에서도 최고 복지수준을 자랑하는 스위스가 만민 평등이라는 기본소득 300만원을 고민할 때 우리는 고작 1인당 30만원 수준(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산출기준)의 복지수혜를 놓고 공방을 벌이는 셈이다. 65세 이상 노인에게 일괄 20만원의 연금을 주겠다는 현 정권의 약속은 차등지급으로 변질됐고 무상보육은 국가대란만 부추긴 채 공전됨으로써 국민 1인당 실질적 선별복지 규모가 이것저것 다 합쳐봤자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 커리큘럼에서 복지는 당초 사회사업학과로 시작됐다. 복지를 국가의무가 아닌 가진자들의 시혜(施惠) 쯤으로 봤기에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 각종 시설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복지사업의 근간으로 여긴 것이다. 80년대 초를 기점으로 대학마다 사회사업학과를 사회복지학과로 이름을 바꾼 이유는 다름아닌 ‘복지’를 필드(field))가 아닌 국가정책의 개념으로 접근했기 때문이고 그 궁극적 목표는 이번에 논란을 빚은 보편적 복지개념인 ‘기본소득’인 것이다.

복지는 곧 공짜라는 등식, 다시 말해 돈없고 힘없는 자들한테 대한 일방적 퍼주기라는 현행의 선별적 복지로는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찔러죽이고 등산로에서 애먼 사람들을 때려죽이는 사회적 낙오자, 이른바 루저(loser)의 돌발적 출현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지금의 불평등 구조로는 국가와 사회의 안녕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가진자들은 여전히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를 숙주로 빽없고 힘없는 사람들을 기망하면서 자기들만의 영화(榮華)에만 혈안이 됐다. 스위스의 기본소득 부결에 홍준표 경남지사가 즉각 이런 SNS 글을 올렸다. “우리나라 좌파들은 (이번 결과가) 이해가 안 될 것같다. 빚을 내서라도 무상복지를 하려는...선심정책은 이제 도를 넘어섰다”.

그는 한끼 당 몇천원하는 무상급식 중단을 선언하는 날 이코노미석의 서너배나 비싼 비즈니스석을 타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가 구설에 오르자 “차관급 이상은 비즈니스석을 이용할 수 있다”며 공무원 여비규정을 들이댔다. 미국출장중엔 부인과 평일 골프를 친 것이 들통나자 “비공식 비즈니스였다”고 둘러댔다.

이런 천민자본주의와 그 천박한 수혜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제 2의 강남 화장실 사건, 제2의 구의역 사건, 제 2의 수락산 사건, 제 2의 사패산 사건은 언제든지 또 일어난다. 그래서 요즘, 국민에게 국가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