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박은식씨의 떡 장사 34년
시동생 넷에, 아들딸…일곱을 가르치고 분가시켜

토박이 열전(7)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떡장사 34년이라니, 제멋대로 상상해 보았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고생고생하며 홀로 아이들을 키웠노라’는 눈물겨운 인생사 한 토막을…. 그런데 박은식(63) 씨의 남편은 공무원이었단다. 고향인 음성에서 행정직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농사까지 지었단다. 비록 면장은 못해봤지만 계장으로 명예퇴직을 하고 오리농장을 운영했다니 상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남편 성낙형 씨는 지난 3월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떡 광주리를 이고 거리로 나섰던 것일까?

“나는 고향이 음성 금왕이고 남편은 음성 대소예요. 1977년에 시집을 왔는데, 시아버지가 바로 돌아가시더라고요. 남편이 맏이에요. 아래로 남동생 둘, 여동생 둘. 우리도 딸 하나에 아들이 둘이니까 모두 일곱 명을 가르치고, 시집·장가를 보내려니 남편 월급만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었던 거죠. 시골이니까 농사를 지으면 되는데, 나는 또 외동딸로 귀하게 자랐거든. 농사짓는 솜씨가 없어서 떡 광주리를 이고 나섰던 거죠. 막내둥이 백일 때, 그 놈 등에 업고 시작했어요.”

그게 1982년이다. 남편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음성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고 박은식 씨는 시동생들과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청주로 나왔다. 시동생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애들은 초등학생이었다. 지난해에 막내아들이 장가를 갔으니 이제 숙제는 끝낸 셈이다. 그래도 매일 새벽 4시에 박 씨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특별히 볼 일이 있을 때만 빼고, 주말이나 휴일도 없고 비가 오고 눈이 와도 한결같은 일상이다.

“청주에는 떡이나 도나쓰(도넛)를 도매로 주는 데가 없어요.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에요.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전 문창시장으로 갑니다. 옛날에는 군만두, 김밥도 팔았는데 지금은 찹쌀도나쓰랑 꿀떡, 바람떡(개피떡), 인절미, 찹쌀모찌(찹쌀떡), 김말이 이런 걸 팔아요. 문창시장 안에서도 물건을 떼는 데가 각각 달라서 한 시간 정도 걸려요. 그렇게 준비해서 청주로 오면 아침 일곱 시, 청주농고 옆에 있는 학생수영장에서 한 시간 장사하고 이리로 옵니다. 오늘도 거기서 한 시간 만에 3만원 어치 팔았어요.”

떡장사를 위해서 운전면허를 딴 게 마흔 살이다. 그 이전에는 대전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때는 한 광주리를 이고 오기도 힘들었다. 차를 사고 나서 싣고 오는 물량이 늘고 이동반경도 넓어졌다. 첫 차는 80만원짜리 중고 프레스토였다. 지금 타고 다니는 중고 로체는 다섯 번째 차다. 한 달 반 만에 한 번씩 엔진오일을 갈 정도라니 중고차 한 대로 4,5년을 버티기 힘든 이유다.

현충일 다음 날, 박 씨를 만난 곳은 그가 두 번째로 좌판을 펼친 봉명동 농수산물시장에서였다. 박 씨는 예전 남주동 깡시장에서도 떡을 팔았다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농수산물시장을 깡시장이라고 불렀다.

“깡시장 장사가 예전 같지 않아요. 여기 상인들도 먹고, 손님들도 먹는데, 시장 손님도 줄었고, 떡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네요. 그래도 옛날 깡시장 때부터 장사를 했으니까 단골들 보고 오는 거예요. 거기에다 빈 종이박스가 나오면 사람들이 가져다주니까 부수입도 생겨요. 여기서 두 시간 팔고 오늘은 공단에 있는 폴리텍대학으로 갈 거예요. 거기서는 애들 쉬는 시간에 맞춰서 딱 20분 장사합니다. 그리고 충북대로 넘어갔다가 오후 1시에 중앙공원 가고, 2시에 새터초등학교, 3시에 대성중학교, 5시 오창고등학교에서 장사가 끝나요.”

매일 이렇게 계획대로 장사가 끝나는 게 아니다. 혹여 라도 물건이 남으면 무심천 롤러스케이트장으로 간다고 했다. 떨이로 떨어내더라도 떡을 남겨 집으로 돌아간 적이 없다. 하루에 10만원 어치를 떼 오는데 광주리를 비우고 나면 7~8만원 정도를 손에 쥔다고 했다. 여기에서 차(車) 연료비 등을 제하고 나면 그저 5만원 정도가 남는 장사다.

현충일에는 대전국립현충원 앞에서 떡을 팔았다. 날이 더워지면서 주말과 휴일에는 미원 금관이나 청천 사담, 화양동 같은 물가로 장사를 나간다. 멀리 가면 멀리 간만큼 일찍 털고 일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약속된 시간에 기다리는 단골들을 외면할 수 없다.

매주 두 번 방문하는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도 약속처럼 찾아가는 곳이다. 인근에 차를 세워두고 뒷문으로 손수레를 끌고 들어간다. 10시45분부터 11시 남짓까지 짧고 굵게 장사를 한다. 손님들은 스무 살 남짓한 청년들이지만 “안녕하세요”라며 깍듯하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학생들도 알은체를 하며 600원 어치, 1000원 어치씩 도나쓰나 김말이를 산다.

“찹쌀도나쓰는 원래 1000원에 일곱 개를 주는데, 학생들한테는 열 개씩 줘요. 하나에 100원씩인 거죠. 김말이는 한 개에 200원을 받고요. 애들이 아침을 못 먹고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이 시간이 되면 나와서 사먹고 들어가요. 사실 학교에 와서 장사하면 남는 게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신기하게 도나쓰랑 김말이만 팔려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다. 그래서 들어오진 말라는 곳에는 굳이 가지 않는다. 어느 공장에, 무슨 요일에 잔업이 많은지도 꿰고 있다. 예전에는 청주공단에 있는 대규모 업체 종사자들이 박 씨의 고객이었다. 하지만 30년 세월에 부도가 나거나 쪼그라든 회사가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광주리장사는 여전히 안녕하다. 박 씨가 오직 발품으로 얻어낸 정보들 덕이다.

“대농이 있었을 때는 엄청났지요. ○○도자기, ○○전자,○○피혁, ○○반도체…. 옛날에는 이런 데로도 다 다녔으니까. 그런데 이제 회사도 많이 없어졌고, 종업원들도 줄고…. 지금은 학생들 방학해서 학교가 한산해지면 공단으로도 다녀요. ○○피혁은 요새 화요일에 잔업이 많아서 그날은 장사가 좀 되고요.”

기술도, 자본도 필요 없는 업종에서 경쟁력은 성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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