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높아…국회해산
5대국회 선거 치러졌지만… 다시 부정으로 얼룩

▲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정부는 광범위한 부정선거를 진행했다. 부정선거를 통해 압도적 지지로 당선이 됐지만 성난 민초들은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권좌에서 끌어냈다. (사진 3·15 선거 당시 투표에 참여한 충북도민, 출처 : 충북100년)

<기획보도>기록되지 않은 4‧19

⓵ 미완의 혁명
⓶ 타오른 불꽃
⓷ 지역별 7‧29부정선거운동 Ⅰ
④ 지역별 7‧29부정선거운동 Ⅱ
⑤ 끝나지 않은 4‧19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인해 촉발된 4.19 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은 결국 권좌에서 물러난다. 독재 정권을 몰아낸 시민혁명 이후인 1960년 6월 15일, 국회는 내각책임제에 입각한 개정헌법을 공포한다. 6월 23일에는 개정된 ‘국회의원 선거법’이 공포됐다. 이에 따라 4대 국회는 해산 되고 새로운 제5대 국회의원(당시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을 선출하는 선거가 1960년 7월 29일에 치러지게 된다.

7월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독재 정부를 끌어내린 4.19 혁명의 열망은 이어졌다. 선거 결과 충북지역에서는 당시 민주당 출마자가 70% 가까이 대거 당선된다.

그러나 이승만 독재정권의 자유당 출신의 기득권 세력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 자유당 출신 인사들은 7‧29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거 무소속으로 변신해 기득권 유지를 노렸다. 이들은 무소속으로 변신한데 이어 갖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정치생명의 연장을 꾀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선거에서 살아남고 이후 5‧16과 12‧12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획득한 군부정권에 가세하기도 했다.

4‧19 혁명을 통해 드러난 당시 민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7‧29선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해 자유당 부역세력과 다시 한 번 충돌하게 된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로 당시 충북 도내 중‧고교생을 중심으로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 운동을 진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선거 전 보은중학생 800여명은 7월 19일 9시경부터 교문을 뛰어나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학생들은 “공명한 선거를 이루어 4.19혁명을 완수하자”는 현수막을 들고 “부정선거 원흉을 엄단하라”고 외쳤다.

선거가 종료된 7월 29일 이후 저항은 훨씬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진행됐다. 7.29 선거 이후 당시 괴산군·중원군·음성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만 228명이 연행되었고 다수가 구속됐다. 구속된 인원만 총 50명으로 당시 규탄운동의 규모가 짐작된다.

하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진행된 운동이지만 역사 속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 부정선거로 촉발돼 4.19 혁명과 미완의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충북지역 민초들이 진행한 7‧29 부정선거규탄운동을 살펴본다.(편집자 주)

 

1960년 7월 30일, 괴산군 민의원(현 국회의원) 개표 업무가 중단됐다. 개표장 개표함은 일부 시위대에 의해 파괴됐다. 성난 군중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진행했다. 검찰‧기동대가 괴산으로 급파됐다. 당시 충북도지사는 군을 출병시킬 것 까지 협의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60년 8월 2일 충북신보사는 해당 사태를 괴산군에서 발생한 개표 중단사태에 대해 보도했다.

“88개 투표구를 가진 괴산군의 민의원 개표는 7월 30일 오후에 중단됐다. 반혁명세력을 규탄하는 데모대가 22개의 투표함을 소각함으로써 개표가 중단된 것이다. 시위대는 이번 선거에서 안동준 후보가 사전 불법선거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군부재자 투표에 안동준 후보만 선거홍보물을 보냈다며, 이는 선거법 위반이라고 항의했다. 시위대 10명은 4시 30분경 민의원 개표장에 들어가 22개의 투표함을 파괴하고, 군 선거관리위원회 광장에서 1시간 30분 동안 시위를 벌였다. 또한 안동준 후보와 김원태 후보를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다. 도선거관리위원회와 검찰·경찰 기동대는 현지에 급파되었다. 황종률 충북도지사는 한때 출병(出兵)여부까지 도·군 선거관리위원회에 협의했다”

충북신보사의 보도에 따르면 7‧29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대처하기 위해 충북도지사는 군대동원까지 검토했다. 괴산군의 상황도 더 심각했지만 음성군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선거가 치러진 이틀 뒤인 7월 31일부터 8월 1일 동안 무소속 이정석 당선자 사퇴를 촉구하는 집회가 음성군 전역에서 벌어졌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음성 주민 300여명은 7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대소면에 있는 이정석씨 집을 부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성난 시위대는 삼성, 금왕, 생극, 감곡면 등 각 면을 다니면서 이정석 선거운동원 집을 파괴했다.

 

연이은 부정선거…폭발한 민심

 

당시 부정선거 규탄운동에 참여한 참가자들과 언론보도 등 기록물을 살펴보면 1960년 4월 혁명을 치루고 3개월 후에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북 4개의 선거구에서 부정선거가 도마에 올랐고, 군 병력 동원 직전상황까지 갔다.

그렇다면 이런 심각한 상황이 왜 발생했을까?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였다. 이때는 자유당의 인기가 급락했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여당이 승리하기가 힘겨웠다. 이로 인해 이승만대통령은 국가의 모든 인적자원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투·개표 과정에서 온갖 형태의 부정행위가 발생했는데 대표적인 것은 3인조 및 9인조 선거다. 선거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비밀선거다. 즉 유권자가 자신이 선호하는 정당이나 후보를 남에게 밝히지 않고,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3인조 및 9인조 선거는 투표장에 유권자가 3인이나 9인이 집단으로 입장해 조장에게 기표한 투표용지를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투표함에 표를 집어넣는 공개투표다.

이런 비민주적인 부정선거는 청주에서도 여지없이 진행됐다. 당시 동아일보 1960년 3월 11일자 보도에는 청주에서 진행된 3인조 공개투표가 자세히 보도됐다.

이에 따르면 청주에서는 3월 9일 오후 7시를 기해 청주시내 36개 동의 부흥친목회(통반장 및 자유당 유지들로 구성된 단체)를 각 동별로 일제히 개최했다. 이 모임은 경찰관이 입회한 가운데 이루어졌는데 3인조 공개투표를 포함한 부정선거 실시방법에 대한 지시가 이루어졌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세부 지시에는 “△ 조장은 선거 당일 오전 5시 30분까지 지정된 장소에 집합할 것 △ 조원은 오전 6시 30분부터 전기 조장이 집합한 장소로 집결케 할 것 △ 조장은 2명의 조원을 인솔하고 투표장에 임하여 3명의 번호표를 일괄 제시하고 투표용지의 교부를 받은 후 투표소에 입장할 것 △ 투표장에 들어가서는 조장의 지시를 받을 것”이라고 되어 있다.

취재 김남균 기자·박만순(함께사는우리 대표)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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