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존경’에 ‘간첩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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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존경’에 ‘간첩인가요?’
  • 권혁상 기자
  • 승인 2004.09.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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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문위원장

   
 12 12 군사반란과 5 18 광주민주화운동의 격동기를 대학에 겪은 김현문씨(충북도학원연합회 음악분과위원장)는 82년 국가보안법의 굴레를 쓰고 교사의 꿈이 좌절됐다. 이후 보호관찰대상자로 ‘창살없는 감옥’에서 감시당했고 아예 18년간 자신의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마침내 지난 2000년 <충청리뷰 >를통해 자신의 상처를 드러냈고 명예회복과 교단복귀를 위해 나섰다. 하지만 김씨를 해직시킨 사립학교에서는 교육부의 복직권고를 거부했고 그때 그 청년교사의 꿈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김씨는 82년 건국대 음악교육과를 졸업하고 경기도 양평의 사립학교인 양평여중(현 양일중학교) 음악교사로 채용됐다. 의욕에 넘치던 청년교사였던 김씨(이하 김교사)의 운명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때는 1학기를 마친 여름방학이었다. 당시 5공 정권은 교사들을 상대로한 ‘이념교육’을 시도했고 그 해 여름 강화도의 ‘호국교육원’이란 곳에서 1기 교육을 시작했다. 교육생으로 선발된 김교사는 전두환 정권의 홍보와 북한에 관한 영화관람, 애기봉 등 안보현장 견학 등 일정을 마쳤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생들과 수업중에 방학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대화를 하게 됐고 김교사는 연수활동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대화중에 김교사는 ‘김대중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자 한 학생이 ‘우리 선생님, 간첩아니야?’라고 농담을 던져 폭소가 터지지고 했다. 양평은 군부대가 많아 군인가족 학생들이 많았고 당시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 ‘간첩’을 연상할 만큼 강팍한 시국인식을 가진 곳이었다.

군사도시, 보안사가 직접 연행조사
 결국 이 한마디가 화근이 돼 김교사는 느닷없이 ‘빨갱이’로 내몰리게 됐다. 수업이 끝난 며칠뒤 교감이 김교사를 운동장으로 불러냈고 승용차에서 내린 3명의 형사가 무작정 수갑을 채웠다. 눈까지 안대로 가린채 끌고간 곳은 어느 여관방이었다. 커튼을 모두 가린채 ‘지금부터 묻는 말에만 대답해, 거짓말하면 죽는다’며 윽박질렀다. “내가 대학에서 사범대 부학생회장이었던 것을 파악하고 당시 학생운동 지하조직 명단을 대라고 추궁했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지만 부인하면 주먹과 발길질이었고 잠도 안재웠다. 김대중을 존경하게된 경위를 말하라고 억지를 부렸고 견디다못해 그들이 시키는대로 거짓 자술서를 쓰게 됐다”

 양평경찰서 창고로 끌려간 김교사는 비녀꽂기, 통닭구이, 고춧가루 물붓기 등 본격적인 고문을 당하게 된다. 보름만에 가까스로 가족면회가 이뤄졌지만 고문경찰이 입회한 상황에서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결국 변호인 접견을 통해 고문사실과 허위 진술서 작성 경위를 말했지만 환갑나이를 넘긴 시골 변호사는 국가보안법 사건 변론에 소극적이었다.

 검찰이 기소한 혐의점은 학생들에게 ‘애기봉에서 북한을 바라보니 2층 양옥집도 있었고 길도 아스팔트로 포장됐고 차량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통일이 되지 못하는 것은 남한에서 북한의 나쁜 점만을 가르치고 헐뜯기 때문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였다.

출소후 보호감찰 대상자로 감시받아
 1심 재판과정에서 학생들은 30~40명씩 단체로 버스를 타고와서 방청을 했고 법정증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검찰측은 3~4명의 학생을 증인으로 내세웠고 재판부는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추가적인 증인신청조차 받아들이지 않았고 변호사는 더 이상 출석하지 않겠다며 변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심 선고가 그대로 확정됐고 자포자기한 김씨는 상고도 포기한채 전주교도소에서 84년 5월까지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

 “출소하던 날, 교도소 정문앞에 가족들과 함께 형사 한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부터 보호감찰 대상자이니 어디를 가더라도 정보과 담당형사한테 보고하라’는 주문이었다. 나와보니 창살없는 감옥이었고 친구들과도 단절됐다. 정상적인 취업도 불가능했고 결국 집사람 이름으로 음악학원을 하게 됐다”

 취재과정에서 당시 양평중 교감이었던 이상백을 만나 사건의 경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발단은 군인 간부인 학부모가 보안대에 연락해 학교에서 연행해간 것이다. 보안대에서 경찰로 넘겼기 때문에 사건이 커진 것 같다. 경찰조사받은 학생들을 불러서 얘기를 들어보니 별거 아닌거 같아서 훈방처리될 줄 알았다. 그 일만 생각하면 김선생한테 죄책감이 들었다. 앞으로 진상조사에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

 김씨는 지난 2000년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명예회복 신청과 함께 교육부에 복직신청을 했다. 하지만 사립학교인 양일중학교에서는 “음악교과 교사 정원이 찼기 때문에 복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광기의 시대에 덧씌워진 국가보안법의 상처는 김씨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가슴앓이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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