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호교사

 89년 5월 28일 당국의 끊임없는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서울 한양대에서 전교조 출범식이 열렸다. 하지만 충북지역 전교조 교사들의 가슴은 무겁기만 했다. 바로 4일전 제천시 봉양읍 제원고에 근무중이던 강성호 교사(당시 28세)가 국가보안법위반 혐의(고무찬양)로 전격구속됐기 때문이다. 제천평교사협의회에 적극 참여했던 강교사가 ‘빨갱이 교사’로 낙인찍힌 것은 전교조에 큰 충격이었다.

 강교사의 혐의사실은 2학년 수업시간에 ‘북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6 25는 북한이 남침한 것이 아니고 미군이 먼저 북침해서 일어난 것’ ‘북한이 못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평화롭고 살기좋은 곳’이라고 발언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내용의 고발장을 경찰에 제출한 장본인 바로 강교사가 재직중이던 당시 제원고 최순길교장이었다.
수업시간에 강교사 보여준 북한사진은 일본인 사진작가가 찍은 것으로 당시 ‘한겨레신문사’ 주최로 열린 ‘두고온 산하’ 사진전시회 출품작의 작품집이었다. 제원고에서 유일한 일본어 교사인 강교사는 1~3학년까지 20개 학급(학생 900명)에서 수업을 진행했지만 이른바 ‘북침설’을 들었다고 진술한 학생은 2학년 7반 여학생 6명 뿐이었다. 해당 학생들은 평소 교실 뒷자리에 앉아 동반결석을 하는등 친밀한 급우관계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북침설을 증언한 6명의 학생 가운데 2명은 일본어 수업 당일 결석한 것으로 드러났다.

 강교사는 당시 수업내용에 대해 “학생들의 수업 집중도를 높이고 분단극복의 통일관을 심어주기 위해 공개된 북한 사진첩을 교보재로 이용했다. 사진을 보여주며 ‘북한주민들은 전쟁직후 폐허가 된 평양을 스스로 힘으로 재건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40년이 된 지금, 북한에서도 주민생활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고 설명한 것에 대해 오해를 한 학생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학교장이 고발, 다수 학생 진술은 묵살
 
사건은 학교장이 문제의 수업이 있은 지 40일이 지난 시점에 고발장을 작성한 점, 2학년 7반의 다른 학생들이 ‘북침설’을 부인하고 있는 점 등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재판 과정에서 검찰측 증인으로 나선 학생들은 ‘6 25는 북침이고, 북한은 잘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재판부가 “그때 어떻게 수업을 받았길래 두 마디 말밖에 생각이 나지 않느냐”고 다그치자 ‘잡담을 하고 있었다. 엎드려 있었다. 잠을 자고 있었다’는 식의 답변이 나와 방청객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단지 A양만이 유일하게 경찰조사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강교사의 북침설을 들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한편 당시 최교장은 지난 98년<충청리뷰> 취재진에게 “경찰서에서 투서가 들어왔다며 수업내용에 대한 자체조사를 부탁해서 A양을 통해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고발과정에 도교육청에도 보고했고 혼자만의 판단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는 입장을 밝혀 상급기관과 공안당국의 사전조율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사건변호를 맡았던 김동현변호사는 변론을 통해 “고교수준 이상의 한국 현대사 공부를 한 사람이면 6 25당시 국내의 미 전투병력이 모두 철수하고 군사고문단만 상주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강교사가 미군에 의해 북침이 이뤄졌다고 얘기했다면 이것은 보편적인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항소심에서 징역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강씨는 전교조충북지부 상근자로 활동하다 지난 2000년 복직됐다. 다른 전교조 해직교사들과 달리 국가보안법 위반 죄목 때문에 가장 늦게 복직결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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