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세평/ 박은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과정

▲ 박은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과정

성안길 입구 지하상가에 다녀왔다. 강의실에서 만난 적 있는 한 청년이 청주에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추모 공간을 만들었다는 페이스북 글을 보고 난 후였다. 강남역에 포스트잇이 빼곡한 것과 달리, 허전하기도 하고 특별히 시선을 잡아 당기지도 않지만, 조금은 위안을 얻었다.

눈에 띠는 추모 열기와 자기 경험을 쏟아내는 여성들의 필리버스터, ‘밤길 걷기’ 행진, 여성단체와 연구자들의 집담회, 국회차원의 토론회, SNS상에서의 논쟁 등으로, 내가 속해 있는 여성주의 커뮤니티는 모처럼 고무되었다. 하루에 한명 꼴로 살해당하거나 심각한 폭력·살해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 강남역 살해 사건 이후의 사회적 현상은 ‘이례적’이다.

‘여성’, ‘젠더’가 일상의 언어로 말해지는 커뮤니티를 떠나 청주로 올 때 마다, 나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묘한 경험을 반복한다. 주변의 크고 작은 일들,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 대한 불편함을, 여성으로서 나의 경험과 느낌을 가지고 ‘소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매사 성실하지 못한 나는, 그동안 미뤄 두었던 영화들을 몰아쳐 보고 있다. 일제 강점기가 시대 배경인 영화 <암살>에서 나라를 팔아먹은 고관대작의 아들이지만 이국에서 청부 살해업자로 살아가는 염세주의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은 독립투사에서 일제의 ‘밀정’이 된 염석진(이정재 분)에게 “당신 같은 창녀”라고 일갈한다.

그보다 먼저 보았던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에서 주인공 정형사(김남길 분)는 마약사범 검거 직전 화장실에서 오줌을 눈다. 극악한 일본의 부역자로 그려지는 ‘염석진’의 변심과 행위가 ‘창녀’로 말해지는 문법. 영화의 주제와 장르를 불문하고 어째서 한국영화에서 남자 배우의 ‘오줌 씬’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지. 영화감독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

드라마 작가가 굶주려 죽고, 수 만부의 베스트셀러 시인이 사회복지 수급자가 되는 시대. ‘세계 3대’를 강조하며 온 미디어를 들썩이게 했던 ‘맨 부커상(Man Booker Prize)’ 수상작품,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드린다”던 작가 한강의 수상소감은 더욱 중의적으로 들렸다.

연작 중 첫 화자로서 남편은 “그녀의 무난한 성격”,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아내와 ‘무난’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남편, 아내, 언니, 어머니, 아버지, 처형 등은 나의 주변, 일상에 실재한다. ‘일상’과 ‘평범’의 이름으로, 공기와도 같은 무의식적인, 내밀한, 그 깊은 폭력이라니. 한동안 내 자잘한 삶의 모습들에 깊이 천착하게 했다.

물론, 책의 주제가 채식주의는 아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채식주의자와 사돈을 맺고 싶지는 않다고 실없이 말했었는데, 채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먹는 행위가, 다만 홀로 음식을 우겨 넣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일상적인 일이자 수많은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버스 안, 골목 상점의 포스터, 시내 대형 간판의 성형광고에서부터, 열 살짜리 딸이 보는 만화 캐릭터와 아들이 즐기는 게임의 주인공, 이젠 공식이자 상식이 된 ‘sex based’의 매체 광고, 드라마와 연예, 개그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같이 피곤하다. ‘고무된’ 저 세계와 나의 일상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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