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사고는 늘 있게 마련이지만 최근에 벌어진 일들은 유독 보통 사람들을 참으로 힘들게 만듭니다. 아직 세상이 뭔지도 모를 겨우 19세 청년을 참혹하게 사지로 내몬 어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란 사건을 조작해 그 억울한 죽음을 개인의 과실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요즘 거리를 지나다가 젊은 아이들만 보면 컵라면조차 먹을 시간도 없이 세파에 짓눌려 살다가 외롭게 스러져간 그 19세 청년이 자꾸만 눈에 밟혀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전남 신안군의 섬마을에서 벌어진 그날 일을 뉴스로 처음 접한 많은 이들은 지금도 기억속에 선한 과거 실미도 사건을 언뜻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순간 사람들의 머리를 스쳐간 것은 섬(島)이라는, 그야말로 생각만으로도 아름다운 이미지가 절로 묻어나는 그런 곳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가녀린 여교사가 어찌 그런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느냐는, 인간들의 가학성에 대한 자책감이었습니다.

이번 섬마을 사건은 특히 자녀를 학교에 맡긴 학부모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점에서 더 이상 할말을 잊게 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미천한 동물들도 비록 가르치지는 않더라도 스스로 지켜야할 처신(?)의 기본은 알아서 챙기곤 합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동물한테도 경오(警悟)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벼룩에도 낯짝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동물보다도 못한 인간들이 대책없이 설쳐대는,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이 됐습니다.

이번 주 리뷰 기사중에서도 목하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교육공동체헌장 논란(2면)과 어느 목사의 이야기(8면) 또한 인간성에 대한 상실감을 유감없이 보여주고도 남습니다. 교육문제가 왜 이념논쟁으로 비화돼 지역사회를 짓누르는지도 답답하지만 그 보다는 스스로를 교육의 주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만큼 교육적인지를 생각하면 너무들 무책임하다는 불신감만이 앞서게 됩니다. 교사와 학생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학교와 학부모 사이가 긴장의 관계로 변질되는 것이 단지 무슨 제도나 룰(rule) 때문만이겠습니까.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처방도 무의미할 뿐입니다.

학교에서 역사과목을 퇴출시키고 국가 권력에 의한 국정교과서를 고집하는 결과가 3.1운동을 무슨 소비자 운동쯤으로, 5.18 민주항쟁을 또 다른 어버이날쯤으로 이해하는 얼치기 젊은이들의 양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는 가뜩이나 디지털과 스마트폰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오로지 기량적, 물리적인 정량(定量)교육만을 강요하는 학교교육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같습니다. 요즘 자녀들과 TV 앞에서 퀴즈프로그램이라도 볼라치면 전문지식은 고사하고 상식이 저렇게도 없을까? 깜짝 놀라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학생은 학생답고 교사는 교사답고 학부모는 학부모다운 교육현장을 원한다면 그 첫 번째 선결과제는 다름아닌 서로의 본업과 본질에 대한 상호 이해와 신뢰일 것입니다. 교육에 대한 천박한 국가개입에서 비롯된 대학들의 인문학 퇴출은 단순히 학문의 위기가 아니라 이젠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문제로 다뤄야 할 판입니다. 작금의 반인륜, 반사회적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잘못된 교육과정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고 봐야 맞습니다.

SBS 방송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알려진 도내 연고의 목사 비위사건은 종교에 대해 다시 한번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다른것보다도 교육과 종교가 늘 국민들로부터 경외시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것들이 타락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역사의 깨우침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번 사건 뿐만 아니라 간간이 빚어지는 성직자들의 일탈은 일반인들에겐 말할 수 없는 배신감으로 엄습합니다.

한 때 식자들 사이에서 종교관련 필독서로 통하던 책이 있습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버틀런드 러셀)와 ‘천국의 열쇠’(A.J 크로닌)입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종교는 물론이고 인간의 근본적 삶의 문제를 고민한다면 지금도 이 책들은 많은 깨우침을 안기고도 남습니다. 두 책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한가지로 귀결될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는 삶이냐’에 대한 물음입니다. 적어도 사람들을 폭행하고 강간하는 가 하면, 축재에 눈을 먼 성직자와 또 이를 뒷받침하는 종교는 이미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엔 예배당이 아니라 아예 바벨탑을 짓는 탐욕한 교회와, 기회만 되면 건물 증축에 나서면서 자기들만의 왕국을 만들려는 사찰들이 도처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저 낮은데로 임하고자 했던 치셤신부는 ‘천국으로 가는 열쇠’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만으로 손에 쥐어진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추악한 사건들이 자꾸 터지고, 21세기의 대명천지에 김정은의 북한체제가 가능한가 하면, 트럼프같은 저질의 지도자에게 미국인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면 지구상의 영장류 중에서도 오로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이성’을 언제까지 믿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할 뿐입니다.

“사회주의는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이다”고 말한 마르크스도 그렇고 “민주주의가 죽었다, 살아 있다”로 공방을 벌이는 대한민국의 잘난 정치인들 역시 요즘 들어선 모두 허섭스레기 같다는 생각이 굴뚝같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 너무 의심스럽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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