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문호들 4 : 청구자 민병산의 ‘무소유’ 삶과 문학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13)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예전에는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지금도 학교 이름이나 상호 따위에 그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바다도 없을뿐더러 가까이 배가 뜰 만한 물도 없는 터에 ‘뱃고을’이란 이름이 다소 생뚱맞지만 이른바 ‘행주형(行舟形)’이란 지형과 용두사지철당간(국보 제41호)에 대한 전설을 듣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 청주 성안길 철당간.

고려 시대 혜원이란 스님이 청주를 지나다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꿈에 부처가 나타나 “용두사에 들어가 돛을 세워 배를 안전하게 하라” 하기에 목암산(지금의 우암산)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고을이 배 모양인지라 용두사 경내에 철당간을 세워 돛을 대신하게 하였답니다. 청주가 주성이란 이름을 얻고 청주 성안길 중심가에 철당간이 지금까지 우뚝 서 있는 사연이 아주 그럴 듯 합니다.

전설은 그렇고, 실제로는 고려 광종 13년(962) 청주의 호족 김예종이 돌림병을 막기 위한 불사의 일환으로 세워 바쳤다고 당간에 적혀 있습니다. 당간은 절에서 중요한 법회가 열릴 때 ‘당(幢)’이라고 하는 불기(佛旗)를 내걸던 장대인데, 전국의 많은 철당간 중에서 용두사지철당간만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까닭은 이 철당간이 금석학적 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당간 셋째 단에 ‘준풍(峻豊)’이라는 고려의 연호와 학원경(學院卿)·학원낭중(學院郎中)과 같이 교육과 관련된 당시의 벼슬 이름이 나타난 당간기가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청주는 본래 성곽도시였으나 1910년대 일제가 도시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완전히 헐어 버렸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헌·영규대사·박춘무가 이끄는 의병이 합세하여 왜군이 점령한 성을 공략하여 탈환했던 역사의 현장이니, 그냥 두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18세기에 그려진 청주읍성도를 보면 4대문과 함께 성내에 병마절도사영과 청주동헌을 비롯한 많은 시설이 자리 잡고 있어 충청도의 행정·경제·군사 중심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의 의지로 사대문 터에 표석을 세우고 ‘본정통’이라는 왜색 거리명을 ‘성안길’이라고 고쳐 부르는 한편, 서쪽 성벽을 짧게나마 복원하는 등 청주읍성의 흔적을 찾기 위한 노력이이어지고 있습니다.

▲ 청주 중앙공원의 압각수. 나무 아래 권근의 시비가 있다.

‘압각수’와 권근 시비의 사연

청주 성안길 안 중앙공원에 조그만 시비가 하나 있습니다. 여말선초의 대학자요 문장가로 이름난 양촌 권근(1352~1409)이 공양왕 2년에 일어난 ‘윤이·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는데, 마침 큰 홍수가 나서 옥사가 무너지자 목은 이색 등과 함께 근처의 은행나무로 올라가 물난리를 피했습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의 무죄를 하늘이 증명했다”며 방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 은행나무가 바로 지금의 ‘압각수(鴨脚樹 : 잎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그렇게 불립니다)’이고, 권근이 석방되면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 읊었다는 시가 나무 아래 비석에 담긴 것입니다. “근거 없는 말로 주공에게 불행이 미치니/갑자기 잘 자라던 벼가 큰 바람에 쓰러졌네./공양왕이 서원에 홍수가 넘쳤다는 말을 듣고/이제야 하늘의 뜻이 예나 지금이나 같음을 알았네.”

오늘날 청주는 충청북도의 행정·문화의 중심지로 인구 80만을 넘기며 날로 팽창하고 있는 도시지만 복닥거린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차분하게 정돈된 느낌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활력이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타지에서 살다가 청주에 처음 온 당신이 ‘잠을 청하는 도시’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잠든 도시도 아니고 잠을 청하는 도시라, 군부정권 하에서 학생들이 심심찮게 시국사범이 되어 수감되던 시절이었으니 그 말은 곧 조롱이었습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듣기 언짢았던 것은, 그 말이 비루하게 살아가는 나를 찌르고 들어오는 칼끝 같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들/앞을 응시하는 일도, 뒤를 돌아보는 일도/말짱 성가신 새들”(졸시 <노인들> 중에서)처럼, 의지를 상실했다면 더 이상 청년이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경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상사 마음먹기 달렸다는 걸 범부인들 모르겠습니까마는 마음먹기가 어려우니……. “세상의 모든 보배를 다 합쳐도 한 사람의 마음만한 값어치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그 보배를 보배로 여기는 게 곧 사람의 마음이니 마음이 아직 어두운 곳에서는 어떤 보배도 다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 이 글은 청주시 가경동 발산공원에 서 있는 민병산 문학비의 비문으로 그의 글 <마음의 체조>에서 옮긴 것입니다.

▲ 청주 가경동 발산공원의 민병산 문학비. 네모 안이 청구자 민병산.

‘한국의 디오게네스’ 민병산

청구자(靑丘子) 민병산(1928∼1990, 본명 민병익)은 청주 북문로 1가 50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세칭 ‘민구관 댁’으로 불렸던 그의 집안은 당시 충북 제일의 부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철학과 문학에 심취했거니와, 방대한 독서를 바탕으로 동서양 철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갖춤으로써 ‘한국의 디오게네스’ 혹은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며 문필가로 살았습니다.

11살 때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여 혜화국민학교와 보성중학교를 졸업했는데, 보성중학교 재학 중에 ‘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27살에 동국대를 졸업하고 청주에 내려와 충북신보(현 충청일보) 기자와 청주상고 강사직에 몸담았던 민병산은 서른 살 되던 1957년 청주를 떠났습니다.

그 후 신동문의 주선으로 신구문화사에서 기획·조사 업무를 위촉받아 3~4년 간 일한 것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줄곧 문필생활로 일관했습니다. 1960년 11월 《새벽》지에 <사일의 철학적 단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필활동에 나선 민병산은, 곧이어 <사천세의 은자>를 발표하여 필명을 떨쳤습니다.

그 후 사상계, 새벽, 세대, 창작과비평, 중앙일보 등의 지면에 수많은 철학 에세이와 전기 들을 발표하며 당대를 풍미했습니다.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사후에 후배들의 뜻으로 유고집 《철학의 즐거움》을 남기게 됐습니다.

풍족하고 안락한 일생을 보낼 수 있는 조건을 버리고 고독과 벗하며 글을 쓰는 것으로 삶을 마친 그의 ‘마음’은 어떤 종류일까요? 그는 생전에 구체적으로 그것을 언급한 적이 없고, 친구들도 일체 묻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선대(先代)의 친일행적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당신은 짐작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 업을 자신의 짐으로 받아들이고 고행하듯 한 생애를 건너간 사람의 인간적 고뇌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사람들의 영욕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무심천은 참 무심하게도 흘러갑니다. 저 물은 어떻게든 흘러서 바다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도 저 강물처럼, 스스로의 의지와 합의로 물길을 터서 도도하게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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