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LA올림픽 첫 출전 한국인, 탈진상태로 9위 골인
권태하 탄생 110주년 세미나 ‘한국 마라톤 대부’ 재조명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했던 권태하(1906~1971) 선생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해 마라톤에서 우승을 일궈낸 손기정 선수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육상 지도자이자 마라톤 개척자다. 하지만 그는 한국 마라톤에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조명을 받지 못했고 행적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 됐다.

▲ 관중들의 환영을 받으며 달리는 권태하. 1932년 LA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권태하 선수는 9위를 기록했다.

이에 이달 초 그의 고향인 충주에서 권태하 선생 탄생 110주년을 맞아 ‘한국 마라톤 개척자, 충주人 권태하를 새로 읽는다’라는 주제의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대학교수와 체육계 인사,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해 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1950년 보스톤 마라톤 우승자인 대한육상경기연맹 함기용 고문은 ‘내가 기억하는 권태하 선배’란 주제로 선생의 발자취를 소개했다. 또 부산대학교 권오륜 교수의 ‘마라토너 권태하의 체육활동에 관한 연구’, 영산대학교 박귀순 교수의 ‘권태하의 마라톤 인생사’, 아이들의 하늘 김희찬 간사의 ‘권태하와 인연 깊은 사람들’ 발표가 이어지며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전 동아일보 이종세 체육부장의 ‘권태하와 동아일보, 그리고 한국 마라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김형목 선임연구위원의 ‘일제강점기 권태하 체육활동의 민족운동사적 의의’ 등의 다양한 주제발표도 있었다. 이들의 발표문을 토대로 권태하 선생의 마라톤 인생사를 풀어본다.

日순사에 폭행당하고도 우승

▲ 권태하

권태하는 1906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가 휘문고보에 진학했지만 퇴학당했다. 일제 통치를 거스르는 불온서적을 읽는다는 이유로 종로경찰서의 사찰대상에 오른 게 퇴학사유였다. 이후 일본 리츠메이칸 중학교를 거쳐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많았던 그는 학창시절부터 중거리 육상, 럭비,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대학 3학년 재학 중 당시 양정고보에 다니던 김은배 선수가 조선신궁 체육대회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마라톤 기록을 달성한 것에 자극받아 스물여섯의 나이에 마라톤 세계 제패의 꿈을 품었다. 도쿄에서 약 100㎞ 떨어진 하코네산에 캠프를 차리고 맹훈련을 거듭해 기록을 2시간 28분대까지 끌어올렸다.

1932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해 올림픽 선발 예선전인 ‘조선 제1예선 육상경기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대회를 이틀 앞두고 권태하는 일본 교통순사에게 폭행당했다. 훈련 도중 교통신호를 위반했다며 구타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상을 입고도 투혼을 발휘해 기적 같은 우승을 일궈냈다. 이 대회에서 1위 권태하, 2위 김은배, 3위 쓰다 세이이치로(일본), 그리고 5위 조선인 이귀하가 차지한다.

▲ 1932년 LA올림픽 당시에 핀란드의 Paavo Nurmi와 권태하가 악수하는 장면. 중간이 일본의 쓰다[津田], 좌측이 김은배./ 사진출처: wikipidia

도쿄 본선에서도 1위로 LA올림픽(1932년) 출전권을 따냈다. 그리고 올림픽 합숙훈련을 위해 부산항을 출발한 권태하는 술에 취한 일본 경찰들에게 불심검문에 응하는 태도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또 다시 구타를 당해 얼굴과 눈 주위에 상처를 입게 된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일본은 예선전 3위를 했던 쓰다에게 코치 겸 선수역할을 맡겼다.

쓰다는 경기 전 권태하와 김은배에게 자기 앞에 나서지 말고 뒤에서 뛰라고 지시했다. 이에 권태하는 선수의 장점을 고려하지 않고 페이스메이커와 자기중심적 전략을 요구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지시를 거부하고 앞서 달렸다. 이는 곧 오버페이스로 이어졌고, 선두그룹에서 달렸던 권태하는 체력 저하로 9위로 처져 탈진상태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결승전 10m를 앞두고 쓰러진 뒤 기다시피 골인하자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 경기에서 쓰다 5위, 김은배 6위, 권태하는 9위를 했다. 그러나 세계 언론은 권태하를 주목해 대서특필했다. 비록 9위에 머물렀지만 기어서라도 결승선을 통과하려는 그의 정신이 바로 올림픽 정신이며, 우승보다 더 값진 스포츠 정신이라고 극찬했다.

▲ 마라톤의 김은배, 권태하, 권투의 황을선 선수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일장기를 달고 LA 올림픽에 참가했다. 나라 없는 LA의 동포들이 태극기를 걸고 3명의 선수를 위해 만찬을 열어주었다. 어린 선수들은 이 만찬장에서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고 한다.

손기정·남승룡 베를린올림픽 지원

올림픽이 끝난 뒤 권태하는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머물면서 남가주대학에 입학, 미국 마라톤의 과학적인 코칭과 훈련법에 대해 공부했다. 또 많은 체육 강연회를 통해 스포츠 철학과 올림픽 소감을 주제로 강연했다. 특히 각지 순회를 통해 미국 육상 스포츠계를 시찰하고 과학적인 연구를 거듭했다. 권태하는 새로운 과학적 코칭법과 훈련법, 스포츠 이론을 통해 올림픽 우승에 대한 열정을 키워 나갔다.

이후 그는 지도자로 변신했다. 특히 손기정의 재능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는 LA올림픽 경험과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토대로 손기정과 남승룡을 도왔다. 그리고 또 다시 올림픽 코치를 맡은 쓰다가 자기중심적이고 자격이 없다며 강하게 비판하는 호소문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아울러 아사히신문 아다미 키오 체육부장에게 ‘쓰다가 코치가 돼서는 안 된다’는 서신을 보냈다. 체육계에 영향력이 컸던 오다미 키오 탓인지 쓰다 코치는 사토우 코치로 교체됐다. 손기정은 “쓰다 코치의 교체는 권태하 선배의 노력으로 이뤄졌다”고 했다.

▲ 이달 초 권태하 선생 탄생 110주년을 맞아 ‘한국 마라톤 개척자, 충주人 권태하를 새로 읽는다’라는 주제의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권태하는 손기정과 남승룡이 경기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전략을 세우고 모든 뒷바라지를 했다. 손기정의 금메달과 남승룡의 동메달 뒤엔 권태하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린 땀이 있었다. 손기정은 살아생전 “내 마라톤 인생은 권 선배의 격려와 충고에 큰 자극을 받았다. 권 선배는 베를린 올림픽을 내 인생 최대의 결전장으로 설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해방 이후 김은배, 손기정, 남승룡과 함께 ‘조선마라톤보급회’를 조직해 마라톤 선수 발굴 육성과 한국 체육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고집스러운 성격에 직언을 마다않아 외로운 육상인의 길을 걸었던 그는 1971년 마라톤에 대한 열정과 투혼을 뒤로하고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