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는 지안(集安)과 평양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삼국의 접경지대인 충북에도 고구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고구려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문화가 혼합된 사례도 흔히 발견된다.

 광대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475년, 대대적인 남하 정책을 편다. 수도를 지안에서 평양으로 옮긴후 우선 한성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장악하게 된다. 백제역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한성백제는 한강시대를 마감하고 공주, 부여 등 금강 유역서 새 둥지를 튼다.

 충북대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부강 남성골 산성은 바로 고구려의 남하시기에 축조된 성으로 고구려의 최남단 기지이다. 이곳에서는 저장 구덩이와 더불어 몸통이 긴 고구려계의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금강유역에서 보기 드문 고구려 산성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구려 시대 청주는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성(娘子谷城)으로 불리웠다. 629년 8월에 있은 낭비성 전투는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신라의 북진정책이 충돌한 싸움이다. 김유신은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영양왕 1년(590), 온달장군은 계립령(계立嶺)과 죽령(竹嶺) 서쪽의 고구려 고토를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전, 아차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온달이 전사한 아차성은 서울 광장동 워커힐 뒷산의 아차성(峨嵯城)이라는 설과 단양의 아단성(阿旦城)이라는 학설이 팽팽한데 최근에는 단양 아단성으로 기울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삼국사기에 ‘온달이 아단성(阿旦城)아래에서 전사했다’고 밝힌 데다 고구려시대 단양의 옛 지명이 을아단(乙阿旦)으로 현지에는 온달산성과 온달설화가 수없이 널려 있다.

 둘째 이유는 온달장군이 되찾겠다고 공언한 고구려 고토의 계립령은 충북 충주시 상모면과 경북 문경을 잇는 ‘하늘 재’이며 죽령은 충북 단양과 경북 풍기를 잇는 현재의 죽령이다. 셋째로 아단(阿旦)이 아차(阿且)로 바뀌고 다시 아차(峨嵯)로 변음됐을 가능성이다.

 일설에는 태조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한 뒤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자 일반인들은 단(旦)자를 차(且)자로 바꿔 썼다고 한다. 또한 목판의 판각 과정에서 각수(刻手)가 단(旦)을 차(且)로 잘못 새겼을 가능성도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학계의 논쟁은 그치지 않고 있는데 서울 아차성보다 역시 단양 아단성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남한강 변으로 가면 고구려의 체취가 짙게 풍겨온다. 국보 제 205호인 ‘중원고구려비’는 한반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비다. 4면 비인 비신(碑身)의 모습은 지안의 광개토대왕비 축소판이며 활달한 글꼴도 똑같다.

 누암리 고분군은 고구려 석실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위 부분으로 가면서 폭이 좁아지는 이른바 궁륭형 천정은 왠지 모르게 고구려의 맛을 풍긴다. 봉황리 마애불도 그렇다. 자연 암벽에 새긴 8구의 마애불은 고구려 불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고구려 장인의 솜씨가 다분히 배어 있는 솜씨다.

 탑평리7층석탑 등 충주 일대의 절터에서 수습되는 기와들 가운데는 고구려계가 심심찮게 발견된다. 두툼한 연꽃잎이 끝 부분에서 반전(反轉)되는 모습은 고구려 기와의 한 특징이다. 청원군 북일면 비중리의 일광삼존불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불상 아랫부분의 X자로 교차된 옷 주름이 북위(北魏)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응하는 길은 1차 적으로 그 물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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