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김수정 젠더사회문화연구소 ‘이음’소장

▲ 김수정 젠더사회문화연구소 ‘이음’소장

한 여자가 죽었다. 남친과 데이트 중 화장실에 갔다가 무참히 살해되었다. 이 사건이 아침뉴스로 전해지던 날 나는 무심하게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억울한 여자가 또 하나 당했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남편에게 맞아 죽고, 남친에게 안면 염산테러를 당하고, 여아라서 낙태 당하고, 뚱뚱한 여자는 온갖 미디어에서 폄하하고, 못생긴 여자가 성형도 안한다고 비아냥거리고, 언제나 성적 대상이 될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니까.

여자가 무시당한다는 것은 흡사 물과 공기처럼 여자가 드러내 문제 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유리모양의 투명한 철옹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부아가 치밀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 언론에서 분석하는 온갖 지식인들의 언설이 도통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묻지마 범죄’란다. 맞다.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묻지 말라고 했다. 자꾸 묻는 걸 아주 피곤해 하는 듯 보였다. 남녀로 편을 갈라 싸우지 말라고도 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남성혐오’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 엄살을 팍팍 떨어댔다. 이것은 한낱 정신이상자의 일탈된 행위에 그치는, 그래서 정신 병력을 가진 사람을 국가에서 더 주도면밀하게 관리하면 되는 냥 대책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해자는 죄다 여성이다. 피해의 대상이 여자이기에 묻지 말라는 것인가? 당연하니까.

우리 사회는 남성 집단이 여성 집단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비율이 83.5%, 성폭행은 98%, 흉악범죄 83.8%로 압도적인 비율의 범죄를 저지른다. 여성 집단은 기업임원이 될 가능성이 1.2%이고, 임금은 남성 집단의 64%만 받는다. 부처의 장관은 여성부만 유일하게 여성 장관이다. 이러한 상황에는 ‘여성혐오’가 있다고 진단하는 게 그렇게 무리인가?

강남 역 살인사건을 바라보는 여성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평소에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분위기를 체득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슨하게 서 있다가도 문이 열려 익명의 성인 남성이 타면 온 몸으로 흐르던 긴장을 경험했던 이들, 퇴근 길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남자라는 걸 알아채는 순간 온 몸으로 감각을 집중해야 했던 소름 끼치던 기억들, 성희롱과 성폭력을 당해도 본인의 책임으로 돌려질 것을 뻔히 알기에 침묵해야 했던 이들 - 그녀들은 이 모든 사건의 기저에 가부장제라는 미명아래 ‘여성혐오’가 또아리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추모행렬을 이룬 여성들은 소망을 담아 강남 역 10번 출구 벽면을 채워나갔다. 심장이 멈춰서는 한마디, “살女주세요, 너는 살아男았잖아” 여/남의 현재를 이보다 극명하게 표현할 말이 있을까.

사건을 브리핑하는 서초경찰서 담당자는 기자회견에서 ‘여성혐오’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했다. TV에 출연한 전문가들은 ‘여성혐오’는 아니라고 했다. 여성들은 다 아는데, 이건 ‘여성혐오’ 범죄라는 걸 다 아는데 그들은 입을 맞춘 건가, 보도지침을 받은 건가. 모두들 도리질을 치며 ‘여성혐오’가 아니란다.

식자층의 궤변 중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남성혐오로 드러난다”고 하면서 “남/녀의 성대결이 되고 말았다”는 진단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대결은 평등해야 대결이다. 일방적 관계에서 여성이 입을 열었다고 대결이 된다는 논리는 가당치도 않다. 혐오가 갑자기 튀어 오른 것이 아니라 일상이었던 것을 여성들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게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젠더체계에 무감해서 몰랐다면 우리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면 될 일이다. 모든 남자들이 가해자가 아니라고 ‘분노’한다면 그보다 강력한 ‘공포’를 느끼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을 주의 깊게 살펴 볼 일이다. 몰랐다고 없는 일이 아니다. 침묵함으로 동조자가 된 남성들은 이제부터라도 세심하게 알아보겠다고 손을 내밀면 될 일이다. 그래서 ‘무뇌아적인 페미니스트가 문제’라고 섣부르게 정의내릴 것이 아니라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똑바로 바라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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