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정치이론적이든 아니면 정치공학적이든 작금의 반기문 대망론은 본질에서 크게 벗어났다. 이러한 수사(修辭)에 대한 실체적 사실성도 애매모호할 뿐만 아니라 외교가가 아닌 ‘정치인 반기문’이라는 인물에 관한 어떠한 예단 역시 지금으로선 결코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우선 며칠동안 전개된 국내 일정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졌다. 오래전부터 차기 대권감으로 각인된데 따른 여론의 촉수를 피할 수는 없었더라도 그가 현 정권과 집권여당의 실세들을 드러내놓고 접촉한 것은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간과한 처사로밖에 안 보인다.

현 정권과의 교감여부를 떠나 이런 운신은 되레 ‘반기문’이라는 상품가치를 일거에 희석시키고도 남는다. 정치가 아무리 생물이라고는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확인됐듯 박근혜 정권의 레임덕이 기정사실화되는 현실에서 비 정치인 출신의 첫 대권행보가 고작 정권과 집권당에 기대는 모습이었다면 긁어부스럼만 만든 꼴이다.

설령 눈도장을 찍은 상대가 야당이었다고 해도 국민들의 반응은 똑같았을 것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외교관이라지만 현실정치에선 기름장어 내공만으론 어렵다는 걸 반기문 스스로가 입증한 것밖에 안 된다. ‘스스로가 먼저 무장할 때만이 권력을 얻는다’는 마키아벨리의 경고를 반기문은 초장부터 무시했다.

JP를 만난 것은 이번 국내 행보의 최대 패착이다. 충청인들의 입장에선 두사람의 만남은 어쩔 수 없이 JP의 정치적 상징성을 전제로 받아들이게 되고 바로 이것이 향후 반기문의 이미지엔 엇박자를 낸다는 것이다. JP가 충청의 맹주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요즘 갑자기 떠오르고 있는 ‘충청 대망론’의 정치적 요체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잘 나갈 때의 JP 정치력은 분명하다. 처음엔 박정희의 조카사위라는 입지로써, 나중엔 이기는 쪽에만 줄을 서는 기생(寄生)의 순발력으로 정치생명을 이어갔다. 3당합당(1990년)과 DJP연합(1997년)이라는 기상천외한 신의 한 수로 권력창출에 1등공신이 되고서도 번번이 토사구팽을 당한 전력은 다름 아닌 다른 세력에 빌붙는 기생정치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도 남았다.

JP의 정치를 말할 때마다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이라는 자진(自盡)의 내성을 굽히지 않은 호남 정치력과 자꾸 비교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잘 나가는 정치인들이 호남에 가서는 갖은 아양을 떨면서도 충청에 대해서는 그저 지나다가 한번 들르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치부하는 까닭을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JP는 충청의 맹주임을 내세워 자기정치를 했을망정 충청의 대망론과는 거리가 멀다. 충청 대망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반기문이 JP를 만나 비밀얘기를 나눈 것은 이래서 허전하다.

반기문과 충청의 대망론을 동일시하는 시각은 문제가 커도 너무 크다. 이제 충청도 출신이 대통령을 맡아야 한다는 ‘충청 대망론’의 핵심은 다름아닌 영호남 패권구도를 깨자는 것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대한민국을 지배하며 국가정서를 반으로 딱 갈라놓은 굴곡진 정치유산을 극복하고 국민대통합의 실제적 단초를 만들자는 게 충청대망론의 궁극적 명분인 것이다. 그런데 반기문은 TK한테로 먼저 달려갔다. 이 와중에 급거 실시된 여론조사에선 반기문의 지지도가 충청보다도 영남에서 더 높게 나왔다. 호남은 당연히 안철수에게 1위 자리를 내줬다.

아직은 가설이지만 만약 반기문이 새누리당 후보로 낙점되고 여론조사에서처럼 TK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면 내년 대선은 지역구도와 동서 분열주의를 절대로 피할 수 없다. 반기문이 친박을 등에 업고 TK 품부터 찾은 것이 아마추어답다는 지적은 이래서 나온다. 그보다 더 급선무는 충청부터 결집시키는 일이고 또 이를 기점으로 호남과 영남에까지 여론을 넓히는 것이다.

반기문 대망론과 충청 대망론을 곧바로 결부시키는 것은 현재로선 명분도 없고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하다. 잘못될 경우 국민상실감만 키우게 된다. 최근 정우택 의원이 방송 등에 출연해 남긴 말, “반기문은 목하 거론되는 대선 후보들 중 앞으로 서로 경쟁해야할 한 사람이고, 아직 충청 대망론은 실체가 없다”는 지적은 맞다.

현재의 반기문신드롬이 우려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른바 ‘이미지 정치에 의한 국가리더십이 재연될 수 있다’는 그 개연성 때문이다. 막상 반기문이 대통령 후보로 가시화될 경우 험난한 검증과 어깃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언론의 진단은 맞다. 그래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반기문의 경우 후보 자질이 아닌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이미지로써 평가받을 소지가 누구보다도 크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르네상스 시대 유럽 사회에 넘쳐났던 “왜 실력있는 리더가 실제로 국가지도자가 되지 않느냐”는 자조(自嘲)와도 무관하지 않다. 겉포장과 이미지만으로 권좌에 오른 국가리더는 결국 ‘가짜’라는 것이고 우리 또한 아주 처절하게도 이를 경험해 왔다.

세계를 부지런히 누비며 미리 정해진 내용의 연설을 주업무로 하는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외교가가 체득한 리더십과, 국민 모두를 어깨에 지고 온갖 위험과 갖은 공격으로부터 이를 지켜내고 책임져야할 한 나라의 대통령 리더십은 분명 다를 것이다.

어쨌든 반기문 대망론과 충청대망론의 교집합은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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