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문호들 3 : 이제현·김시습·곽예의 자취를 찾아서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12)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미원면 가양2리 쟁골(수락동)에 있는 수락영당. 익제 이제현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다.

고드미 마을을 나오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달리는 것이 요즘 삶입니다만, 대개는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 갈래이기 때문이라던 당신의 말을 생각하며 미소 짓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길은 좁아서 외롭고, 앞을 다투어 몰려가는 길은 넓어도 혼잡합니다. 상당산성으로 내처 올라가려던 마음을 바꾸어 고개 넘어 미원으로 향합니다. 미원면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511번 지방도를 따라 초정 방향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가양2리에 가면 쟁골(수락동)에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영정을 봉안한 수락영당이 있습니다.

이제현은 고려 후기의 학자로 시(詩)·문(文)·사(辭)는 물론 경사(經史)에도 두루 통달한 대문호였습니다. 목은 이색이 묘비에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라고 격찬한 것처럼 우리나라 문학사상 최고봉으로 꼽는 인물인데, 이러한 위치는 시문도 시문이려니와 특히 그의 저서 《역옹패설》에 실린 비평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인로의 《파한집》 및 최자의 《보한집》과 더불어 고려시대의 3대 비평문학서로 꼽히는 《역옹패설》은 뒤에 조선시대에도 출판을 거듭하며 문학비평의 길잡이 구실을 한 고전적인 저작입니다. 한편 <정과정>과 같이 소멸될 뻔했던 고려속요 17수를 소악부체로 한역하여 전함으로써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이바지한 점 또한 우리 문학사에서 길이 남을 공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청주 동북쪽의 상당산을 둘러싸고 있는 상당산성은 보은 삼년산성과 함께 충북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꼽힙니다. 조선 숙종 때 개축했다는 기록에 따라 백제 때부터 있던 토성을 석축(石築)으로 고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 축성기술과 산성 문화를 집약해 보여주고 있어서 유네스코 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오르기도 했을 만큼 인문학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입니다. 효종 때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옮겨와 자리 잡은 청주읍성을 보호하는 배후 요새로서 기능이 강했을 것입니다. 시대별로 여러 차례 개축하고 복원했습니다만, 본래 기능을 잃은 성곽은 무료하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성 안에는 논밭과 함께 저수지도 있어 사철 풍광이 제법인 데다, 전통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동동주나 토종닭을 팔며 가까운 도심에서 올라온 청주시민들의 유원지 구실을 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남암문에서 미호문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걷노라면 서북쪽으로 펼쳐진 청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 상당산성 공남문 앞에 건립된 매월당 김시습 시비. 시 <유산성>이 새겨져 있다.

공남문 앞 잔디밭에는 매월당 김시습이 전국을 유랑하는 길에 청주 상당산성을 돌아보고 남겼다는 시 <遊山城>을 새긴 시비가 있습니다. “싱그러운 풀내음 신발에 스며드는데/활짝 갠 풍광 맑기도 하여라/들꽃마다 벌들이 꽃술에 입 맞추고/살진 고사리 흩어져 향기를 더하는구나/아득히 바라보니 웅장한 산하/높이 오를수록 의기도 드높구나/사양 않고 저물도록 바라본다네/내일이면 곧 남녘을 떠돌 몸” ― 기운 생동하는 산하를 바라보는 흐뭇함과 나그네로 떠도는 비애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남암문 위에 서서 무심천 건너 서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매월당을 상상해 봅니다. 앞 구절의 장쾌함이 클수록 뒤 구절의 씁쓸함도 큽니다.

이십대 후반, 이문구의 소설 《매월당 김시습》을 거듭해서 읽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오세(五歲) 신동으로 이름났던 매월당이 계유정난 소식에 공부를 작파하고 반승반속(半僧半俗)으로 떠돌다 일생을 마친 것은 두루 아는 바와 같습니다. 그토록 속절없는 생애를 살다 간 사람의 시를 새긴 후인들의 마음은 어떤 종류일까요. 아무래도 청주와 연고가 없는 매월당의 문학을 높이 사서 기리자는 건 아닌 것 같고 유원지가 된 산성에 들러리 노릇으로 세운 것이 분명한데, 이런 억지춘향이 절의 꼿꼿한 선비에 대한 대접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어차피 절개라든가 지조라든가 그런 덕목을 중하게 여기는 시절도 아니니 마음 쓸 것 없다며 크게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성고개를 넘습니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금북정맥이 청주에 들어오면 낭성 추정재를 거치고, 선두산, 선도산, 것대산, 상봉재, 상당산, 구티재로 산줄기가 이어지며 한강 물과 금강 물을 나눕니다. 잠깐 한강유역으로 건너갔다가 산성고개를 너머 다시 금강유역으로 들어가는 셈입니다. 2009년 상봉재 쪽 터널길이 개통된 이후 고갯길은 차량통행을 막고 산책길을 조성했습니다. 사람이 손을 대 억지로 만든 것이니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차가 다니지 않는 것만으로도 딴 세상이 된 것같이 고즈넉합니다.

▲ 연담 곽예의 시비. 시 <감도해>를 새겼으며, 옛 명암약수터 위 식당 뒤편에 세웠던 것을 골짜기 끝 사당 앞으로 옮겼다. 사당 아래쪽 오른쪽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고개 아래 명암약수는 물이 끊긴 지 오래되어 죽어가는 사람도 살렸다는 옛 명성이 무색합니다. 물이 끊기니 사람도 끊겨서 찾는 이가 드물고 옛 건물만 남아 흥성했던 시절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그 약수터 위 골짜기로 올라가면 고려 말의 유명한 문장가인 연담 곽예(1232~1286)의 시비가 쓸쓸하게 서 있습니다. 청주 곽씨 문중의 후손이 세운 이 시비는 청주 제1호 문학비로 꼽히지만 거기 있는지조차 아는 이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곽예는 성품이 강직한 것으로 정평이 났지만, 비 오는 날이면 혼자 맨발로 연못의 연꽃을 감상하던 고상한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연꽃을 보러 세 번이나 삼지를 찾으니/푸른 잎 붉은 꽃은 예전과 다름없네./오직 꽃을 바라보는 옥당의 손님만이/마음은 그대론데 머리털만 희어졌구려.” 한림원으로 있을 때 개성 숭교사의 연꽃을 보며 읊었다는 이 시가 그의 섬세한 면모를 짐작케 합니다.

이제현은 그의 저서 《역옹패설》에 “장원급제한 사람으로서 남을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지 않는 이는 오직 곽예 공뿐”이라고 세상 사람들의 말을 빌려 연담의 사람됨을 적었습니다. 시비에는 <감도해(感渡海 : 바다 건너감을 슬퍼함>가 새겨져 있습니다. “슬퍼라, 저 강남의 십만 군졸들이/외딴섬에 기어올라 알몸으로 서게 됐구나./지금도 원한의 백골이 산처럼 쌓였으니/긴긴밤 외로운 혼이 하늘 아래 울먹인다./행여 당시의 장수가 살아서 돌아왔다면/이 일을 생각하여 어찌 슬프지 않으리./만고에 장하여라 오강의 초패왕은/돌아가기 부끄러워 공업을 버렸다네.”

이 시는, 고려 충렬왕 7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 바다를 건널 때의 참상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 원나라를 풍자하고 징병에 끌려온 병졸들의 고통을 절실하고도 유려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떨게 하던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시행된 일을 두고 가타부타 쓴 소리를 하는 것은 세상물정 모르는 무모함일까요, 글 읽은 자의 도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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