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의 삶과 문학, 순정한 문학정신에 경배하며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11)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단재 신채호. 청주 사람들이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스승으로 첫손에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낭성면 귀래리에서 성장하였고 유해(遺骸) 또한 그곳에 묻혔으니 청주 사람으로 기록되어 마땅할 것입니다. 귀래리의 본래 이름은 ‘고드미’ 혹은 ‘고두미’입니다. 조선 광해군 때 신요(申橈, 1550~?)는 고령 신씨 가문의 사람으로 권세에 맞서다가 조정에서 쫓겨나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인조반정 후 임금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곧은, 곧은이, 고드미 마을이라 하니 신채호의 ‘대쪽 성품’은 아마도 가문의 내력인 모양입니다.

▲ 신채호 선생의 유택과 사당이 있는 고드미 마을에 단재기념관이 문을 열고 이따금 찾아오는 참배객들을 맞고 있다.

신채호를 문학인의 범주에 넣어 논할 수 있느냐고, 당신은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낭객의 신년만필> 같은 뛰어난 논설을 썼던 언론인이었고, 《조선상고사》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주체적 역사학자였으며, 다물단(多勿團)이나 아나키즘으로 설명되는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가 분명한 사람이니 당연한 물음일 것입니다. 1936년 뤼순 감옥에서의 옥사가 잘 보여주듯, 그의 다양한 삶은 결국 독립운동의 실천으로 요약됩니다. 신채호의 문학 또한 철저하게 그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독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역사관은 곧 그의 문학관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찍이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에서 “시가 성하면 나라도 역시 성하고 시가 쇠하면 나라도 역시 쇠하며, 시가 존속하면 나라도 역시 존속하고 시가 망하면 나라도 역시 망한다.”고 역설했고, <소설가의 추세(小說家의 趨勢)>에서는 “소설은 국민의 나침반이라. (…) 소설이 국민을 강한 데로 이끌면 국민이 강하고 소설이 국민을 약한 데로 이끌면 국민이 약하며, 바른 데로 이끌면 바르고 사악한 데로 이끌면 사학해진다.”고 강조한바 있습니다. 평론을 보건대 심미적 요소보다 공리적(公利的) 기능에서 문학의 가치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가 망하면 나라도 망한다’

우리 근대문학사에 문학의 길을 이토록 간절하게 걸어간 작가가 또 누가 있을까요. 그저 하기 좋은 말로 평론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신채호는 <을지문덕전>, <최도통전> 같은 역사 전기소설과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같은 몽유록계 소설 작품을 남겼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각성시키기 위해 역사 속의 위대한 영웅을 되살려낸 것입니다. 개화기라 하면 흔히 신소설을 내세우는 문학사가 그의 소설을 제쳐놓았듯이, 학교에서 금과옥조로 가르치고 배운 서구적 잣대를 들이대자면 신채호의 소설은 형식이나 미학적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신채호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삶과 문학을 관통하는, 범접할 수 없는 문학정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기는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주체적 개화주의자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채호가 일본을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빼앗아간 강도’(<조선혁명선언>)로 규정하고 일체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걸어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족적은, 상당수의 신소설 작가가 친일의 길을 걸으며 개인의 안위를 꾀하고 오명(汚名)을 길이 남겼던 것과 대조적인 것입니다.

“너의 눈은 해가 되어/여기 저기 비치우고지고/님 나라 밝아지게.//너의 피는 꽃이 되어/여기 저기 피고지고/님 나라 고와지게.//너의 숨은 바람 되어/여기 저기 불고지고/님 나라 깨끗하게.//너의 말은 불이 되어/여기 저기 타고지고/님 나라 더워지게.//살이 썩어 흙이 되고/뼈는 굳어 돌 되어라/님 나라 보태지게.”(시 <너의 것> 전문) 이 순정한 사내의 시심(詩心) 앞에서 ‘그가 문학인이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라면, 문학을 얼치기로 배운 잡배이거나 다른 속셈이 있거나 두 가지 부류 중 하나일 것입니다.

▲ 1997년 청주 예술의 전당 광장에 세운 신채호의 동상. 전국 각지에서 신채호의 고귀한 정신을 흠모하는 사람들 8000여 명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2009년 서거 80년만에 국적 회복

옛것과 새것이 섞여 요동치는 시대, 한학으로 몸을 일으켜 세상에 나온 신채호는 끊임없이 자신을 변혁하여 아나키스트로 생을 마쳤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이 해방되는 수준을 넘어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데까지 나아간 그의 열정은 참으로 놀랍고도 두려운 것입니다. “눈 오는 날이면 아이 손을 잡고/당신 앞에 나와 얘기해 주고 싶었습니다./너의 피가 아직 붉은 것은/저 죽어서도 꼿꼿한 사내 때문이라고.”(졸시 <忍冬 - 단재 선생의 동상 제막식 날에> 부분)

신채호는 옥중에서 심각한 병세를 인지하면서도 일제의 보석 제의마저 타협이라며 거부했습니다. 생전에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의 유골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승과 저승이 바뀐 후이니 당신의 의지와 후손의 도리 사이를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그는 안식할 수 없었습니다. 오랜 망명생활로 민적(民籍)이 없었으므로 매장 허가를 얻지 못하고 오랜 세월 암장(暗葬)인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암장이란 암매장, 남몰래 장사지낸다는 말입니다. 나라를 잃었으므로 대한 사람도 아니요 그렇다고 일본 국적으로 살 수도 없었던 신채호의 국적은 그의 서거 80주년이 지난 2009년에야 비로소 복구됐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훈장을 서훈한 이후로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떳떳하게 묻힐 수도 없었던 겁니다. 이게 온당한 대접일까요?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게 있습니다. 전형적인 국가주의 혹은 군국주의 유물이며, 지금도 학교는 물론 모든 공공기관의 공식행사에서 강요(?)되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애국심을 강조하려면 그런 ‘의도적 푸대접’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충성을 다하고’ 버림받거나 ‘민족을 배반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서고’ 권세를 누리거나, 너라면 어떤 길을 갔겠느냐고 묻고 싶은가요?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는 그토록 먼 거리임을 새삼 깨달으며, 고두미 마을에서 몸서리를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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