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서울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을 놓고 범죄의 성격을 다투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다.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면 정신분열증 환자의 일탈이냐의 공방 속에 전문가 집단과 언론들은 점차 후자쪽으로 기울고 있다. 여성이 대통령인 나라인지라 여성혐오에 따른 살인으로 규정할 경우 아무래도 국가가 떠안아야 할 부담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설령 이번 살인사건이 조현병(調絃病)이라는 정신질환에 의해 빚어졌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개인보다는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따져야 설득력이 있다. 그가 사회부적응자로 살아 오기까지는 거기엔 반드시 한 개인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인 맹점이 반드시 깔려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건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제 갓 스물세 살의 꽃다운 한 여성이 너무도 허망하게 죽었다는 현실이고, 이런 야만성 앞에선 범죄의 성격을 따지기 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해야 그나마 그녀의 죽음에 속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건 이후 전국의 여성들이 들고 일어나 추모행렬을 이어가면서 국가 이슈로까지 부각시킨 처사는 백번이고 옳다. 이 사건을 꼭 여성의 인권문제로만 귀착시킬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 여성관련 거대 담론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남성과 비교되는 여성의 상대적 박탈감을 사회 문제로 부각시킨 1등공신은 다름아닌 여성 스스로의 ‘행동’이었다. 가장 상징적인 여성 참정권만 보더라도 그렇다.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참정권을 인정받은 뉴질랜드를 움직인 힘은 이미 5년전에 시작돼 번번이 좌절하면서도 끊임없이 시도된 여성들의 국민서명 즉 청원운동이다. 또한 흑인 참정권보다도(1870년) 50년이나 뒤져 여성 비하의 빌미가 됐던 미국의 여성참정권 보장(1920년) 역시 여성 선각자들이 1848년부터 그야말로 투쟁으로 일궈온 사회운동의 결과다.

우리나라는 1948년 헌법제정과 동시에 여성참정권을 부여받았지만 이 또한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가부장권과 유교의 족쇄에 신음하면서도 기회만 되면 목소리를 높여오던 여성의 내공이 1898년 서울 북촌 여인네들의 여권통문(女權通文)으로 표출된 것이 근대 여성참정운동의 효시라고 보면 된다.

사건 이후 강남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포스트 잇 애도물결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여성들의 ‘행동’이다. 그것이 여성의 안전을 위한 국가정책이나 대책을 이끌어내는 동인이 되든 하다못해 공중화장실의 출입문을 남녀로 구분하는 사후조치를 얻어내든 그건 오롯이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성과물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 사건의 본질이 무슨 제도나 정책 차원의 난맥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어떠한 명분을 들이대도 강남역 살인은 물리적으로 숙명의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에 대한 수컷의 만행, 테러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날 범인이 화장실에서 맞닥뜨린 사람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고, 같은 남자라도 자신보다 덩치가 컸다면 그런 참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정신병자였다고는 하지만 그가 범의(犯意)를 갖기까지는 자기보다 육체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라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고 결국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도 현실의 이러한 문제이지 단순히 범죄의 성격을 가려 무슨 예방책이니 대책이니를 따질 일이 아니다. 멀쩡하게 귀가하던 여인이 수백조각으로 해체돼 살해되는가 하면, 가녀린 동남아 여인들이 돈 때문에 한국남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밤낮으로 얻어터지고 심지어 싸늘한 사체로 하천에 버려지는 작금의 현실, 여기에다 “위안부는 생계가 어려워 스스로 몸을 판 창녀”라는 천인공노할 망언을 일삼는 지만원같은 반(反)인간들이 대한민국에서 설쳐댈 수밖에 없는 이유, 바로 이것을 성찰하지 않고서는 제2, 제3의 강남역 살인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요즘 ‘차이나는 도올’로 맹활약중인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1986년 초판)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오른적이 있다. 우선 제목부터 도전적인데다 내용 또한 성(性)에 대한 원색적이고도 살벌한(?) 용어를 동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여성이라는 성을 놓고 동양적· 서양적 가치관을 아주 실체적으로 비교분석함으로써 공전의 히트를 쳤다.

여성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동양철학에 들어갈 수 없다고 일갈한 그는 여자라는 인간의 문제는 여자라는 특수성(femininity)을 통해서만 답이 나오는데도 당시의 여성운동이 사회불평등이나 병리적 현상에만 천착해 이루어지는 바람에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경고했다. 30년 전의 통찰이지만 이 말은 이제 와서 오히려 가슴에 와 닿는다.

법과 제도의 양성평등으로 여권 혹은 여성상위 시대를 외치는 지금, 이제 여성들도 제도의 불합리와 불비(不備)만을 한탄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여성의 실존과 의식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실천의 문제이다. 여성의 의식이 지향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는 여성 스스로의 용기가 근본적인 처방임을 그는 일찌감치 설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이끌어내야 할까? 그 답은 당연히 여성들한테 있다. 단지 물리적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늘 피해자로 남아야 하는 현실, 이것을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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