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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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야 한다
  • 충청리뷰
  • 승인 2016.05.1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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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소설가 최용탁의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이연호 꿈꾸는책방 대표

▲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 최용탁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오래 묵어 버려진 밭을 빌려 농사를 지었습니다. 출근길에나 잠시 들여다보는 얼치기 농사인지라 주변의 도움 없이는 어림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농기계조차 접근이 쉽지 않은 비탈이라 거두는 소출은 ‘겨우 요것!’이었지만 들어가는 품으로만 따지자면 만석지기 대우는 받을 수도 있었지요. 800평이나 되는 밭이니 이것저것 심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그 해에는 서점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작물을 제대로 심지 못했습니다. 봄날도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빈 밭을 모두 옥수수로 채우고 말았습니다.

여름 휴가길에 빈번하게 만나는 현수막이 ‘옥수수 팝니다’입니다. 차라도 밀려 출출해지게 되면 옥수수 쪄내는 냄새가 여간 구수하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옥수수 수확 철이 바로 한여름의 일이라 그렇습니다. 옥수수도 담배나 고추농사처럼 한여름의 삼복 더위를 온전히 견뎌야 하는 일입니다. 거친 옥수수 잎사귀에 맨살을 베이지 않으려면 제아무리 삼복 더위라 할지라도 팔이 긴 작업복을 걸쳐야 하고, 뜨겁게 쏟아지는 햇살을 견디려면 수건이라도 둘둘 말아 머리 위에 얹어야 합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찜질방이 따로 없습니다. 그해 여름도 지독히 더웠습니다.

가락동 시장에 올려볼 생각으로 전날부터 동네 친구들을 꼬드겼습니다. 짜장면에 탕수육까지 곁들여 고량주를 돌릴 때만 해도 100자루만 따서 올리면 삼겹살을 굽겠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이장으로부터 전해들은 소식은 코미디가 따로 없었어요. 웃지도 못하는 코미디였지요. 어른 팔뚝만 한 옥수수를 30개씩 담아 만든 특등급 한 자루 값이 단돈 1000원에 매겨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상하차비와 제반 비용을 제하고 나면 800원 남짓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허망한 노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낫자루만 바삐 찾는 농민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지금도 그래야 한다는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시쳇말로 ‘개뿔’입니다. 아직까지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농부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이 변한지 오래되었습니다. 도시인들의 요사스런 밥상은 물론이려니와 농민 자신들의 먹거리 조차 더 이상은 땅에서 얻어내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자본의 흐름과 욕망에 의해 조작되고 결정되는 요상한 시스템에 갇혀 버린 셈이지요.

이제는 콩 심은데 콩 안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콩을 심어 쪽박을 거두고 맙니다. 간혹 억세게 운이 좋아 팥 심고 금덩이를 캐냈다는 소문을 듣기는 합니다만 쪽박을 거두는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로스쿨 지원서에 기록해 둔 부모의 지위가 합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현대판 음서제도의 위력을 확인하면서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소리가 어찌 코미디 같지 않겠습니까?

교육과 언론은 여전히 “콩밭에서 콩을 거두지 못한 것은 너희들이 게으른 탓 아니냐”고 윽박지르기 여념이 없습니다. 더욱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콩밭에서 금덩이를 캔 사람들이 금덩이를 캐내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당신들은 모른다. 그러니 그 결과는 당연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무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최용탁은 충주에서 사과를 기르고 글을 쓰며 삽니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농민이라는 이름을 몸 깊이 새겼기에 그의 글에서 농촌의 아픈 현실과 농민의 고단한 삶을 포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에게 ‘전태일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단풍 열 끗>도 농민의 현실을 가감 없이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농사짓는 틈틈이 생각을 주워 담아 펴낸 산문집,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에도 이 같은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울분을 담겨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나야 하지 않겠냐는 항변이 거침없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는 글쓰기가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불편부당한 현실의 두께가 두꺼울수록, ‘금덩이’를 캐내지 못하는 찌질한 인간들이 머리 숙여 반성해야 할 항목이 점점 더 늘어날수록 그의 ‘글쓰기’는 더욱 두려운 일이 되겠지요. 선거 때만 되면 어김없이 낡고 오래된 권력에 표를 던지고 마는 낡은 호미질 앞에서 그의 ‘글쓰기’는 두려움을 넘어 절망에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맨손으로 갈아엎어야 할 마음의 밭이 저리도 당당하고 지치지 않는 것이니 어찌 두렵고 절망적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돈과 경쟁, 외화(外華) 따위에 더 이상 짓눌리고 싶지 않다는 자존감과 함께 농사를 짓는 게 이 파괴적인 세기의 열차에서 하차하는 길일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아들아, 너는 어떻게 살래?>의 절망적 글쓰기는 누구도 지우지 못하는 희망을 담게 됩니다. 그의 두려운 ‘글쓰기’가 우리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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