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는 높고 위험한 곳’ 넘어 청주의 문호들을 만나다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10)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피반령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본 가덕면 일대. 멀리 청주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피반령을 넘습니다. 우리말의 자음동화 현상에 따라 사람들이 대개 ‘피발령’이라고 부르는 고개입니다. 그 독특한 어감 때문에 한번 들으면 잘 잊히지 않는 곳이죠. 보은과 청주를 잇는 주요 통로 중 하나이고, 해발 360m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인근에서)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라고 적었을 만큼 험준한 고개입니다. ‘령(嶺)’이라는 접미사가 주로 백두대간 상의 고개를 말할 때 쓰인 것으로 미루어 보면 옛 사람들이 피반령을 얼마나 큰 고개로 인식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요즘 사람들이야 자동차를 이용하니까 인식하기 어려울 겁니다. 대개는 ‘불편하다’는 느낌 정도일 테고, 좀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재미있다’고 느낄 수도 있을 테죠. 넓고 반듯한 길을 싫어하는 당신은 후자 쪽일 게 틀림없습니다.

걸어서 넘어보면 ‘큰 고개’라는 게 어떤 건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태 전인가요, 한여름에 피반령을 걸어서 넘은 경험이 있습니다. 당신이 걷는 이유를 물었을 때 나는 “이유는 분명치 않다. 삶이 대개 그런 것처럼!” 하며 제법 폼을 잡았습니다만, 머지않아 길에 나선 걸 후회했습니다. 정말이지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더군요. 저 모퉁이가 끝이다 싶으면 또 나오고, 저 굽이가 마지막이다 싶어 돌아보면 그 역시 섣부른 생각이고…….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가 눈물이 난다” 하는 노랫가락이 절로 흘러나오는 중에 인생길을 왜 고갯길에 비유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중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일 굴뚝같았거니와 아들아이와 동행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어린 아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길은 ‘포기할 수 없는’ 길이었고, 고갯길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피밭이 있는 고개 ‘피밭령’ 설

그렇게 넘기 힘든 고개가 가로놓여 있는데도 보은 사람들이 청주를 갈 때 주로 이용했던 것은 거리상 가까운 길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름길, 그것은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며 보편화된 욕망이죠. 보은에서 수리티재를 넘고 피반령을 넘고, 가덕에서 또 미테재를 넘어야 비로소 청주인데, 볼일을 보고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은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의 행렬을 상상해 봅니다. 그들이 느꼈던 삶의 희로애락은 지금 사람들의 그것과 다른 것이었을까요?

‘피발령’이란 이름을 얻은 데에 다짜고짜로 조선 중기의 문신 이원익(李元翼)이 등장하는 건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고 별호 때문에 세칭 ‘오리(梧里) 대감’ 혹은 ‘오리 정승’으로 불렸던 이원익은, 서북지역인 평안 감사와 안주 목사를 지낸 후 내직으로 옮겨가 중앙정계에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조직으로 경상도에 목(牧)이 설치되었던 고을이 상주·진주·성주 세 곳뿐인데, 경주 목사로 부임하는 길이라는 것부터 당치않습니다. 왜란이 한창일 때 우의정 겸 강원·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로서 삼남지방을 돌아보는 행로에 피반령을 지나갔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단신(短身)으로도 유명했던 그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구종(驅從)들을 기어가도록 하여 손발에서 피가 나도록 혼내줬다는 일화에서 ‘피발령’이란 지명이 유래됐다는 설은 재미있긴 하지만 납득하긴 어렵습니다.

‘피발령’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피반령’이 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미 ‘피반대령(皮盤大嶺)’이란 기록이 있다면 1547년에 태어나 활동했던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런 지명이 생겼다는 설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옛날 벼농사가 성하지 않을 때 백성들이 주요 식량으로 삼았던 기장(稷: 오곡의 하나로 꼽히며, 오늘날 논에서 볼 수 있는 ‘피(稗)’와는 다르다)을 ‘피’라 하였는데, 피밭이 있는 고개라는 말로 ‘피밭령’이라 불리던 것이 ‘피반령’으로 기록됐다는 설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오곡 중에 제일로 꼽던 쌀 소비량이 커피 소비량에도 못 미치는 시절이 됐다는 당신의 한탄을 생각하면 하나 마나 한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일제 때의 독립지사이며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정을 모신 단재영당. 영당 뒤편 언덕 너머에 묘소가 있다.

청주로 가는 길목 ‘고두미 마을’

피반령 고갯마루에 서면 비로소 청주가 눈에 들어옵니다. 얼마 전까지 청원군에 들었던 가덕면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청주나 청원이나 한 고을이죠. 본래 통틀어서 청주군이었던 것이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를 설치하고 청주군을 청원군으로 고친 것이 두 고을로 나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뉘어도 고약하게 나뉜 것이, 동서도 남북도 아니고 청원군이 청주시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죠.

2005년부터 자치단체 통합 논의가 일었고, 주민 찬반투표가 두 번이나 부결된 후에 세 번째 시도에 비로소 가결되어 2014년 7월부터 통합 청주시가 출범했습니다. 십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던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것은 당신도 아는 바와 같습니다.

사실 나는 자치단체 간 통합을 유도하는 정부 정책이 늘 못마땅했습니다. 도시의 덩치를 키울수록 중앙의 통제는 쉬워질지 몰라도 그만큼 ‘자치’와는 거리가 멀어질 테니까요. 규모가 작을수록 주민들의 의사로 결정하고 집행하고 감독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된다는 건 불 보듯 환한 사실 아닙니까. 반대로 규모가 커질수록 대의(代議)를 명분으로 나선 정치인들의 영향력만 늘려줄 뿐입니다. 주민참여의 기회가 줄어드는 데에는 눈을 감고, 통합만 하면 주민들의 삶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거라고 호도하는 것은 조삼모사로 원숭이를 속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멀리 하늘가 낭성면 귀래리 쪽에 시선이 머물자 마음이 급해집니다.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한 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도종환 <고두미 마을에서> 부분) 백화가 만발하는 춘삼월이나 산천초목이 초록으로 짙어가는 오뉴월에도 “한 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이 내리는 곳, 한국 근대사의 모순이 응어리져 있는 곳, 고드미 마을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청주로 들어갈 수 없는 마음, 당신은 헤아릴 것이라 여깁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