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옥산면 금계리 고 곽상영옹 ‘금계일기’ 발간, 일제·근현대사 관통한 일대기

한 초등학교 교사의 전 생애가 담긴 일기가 책으로 출간됐다. 지난 2000년 작고한 고 곽상영옹은 46년간 교직생활을 했고 64년간 일기를 써왔다. 아들인 곽노필씨(55·한겨레신문 선임기자)는 “가시 투성이의 20세기 덤불숲을 헤쳐가며 네 동생과 열 자식을 키워낸 한 교사의 분투기”라고 소개했다.

<금계일기>(지식과교양)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은 ‘개인기록을 통한 현대사 재구성’을 목표로 사적 기록물 등을 발굴, 복원해온 전북대학교 ‘SSK 개인기록과 압축근대연구단’이 펴냈다. 사륙배판(18.8×25.7㎝)의 큰 판형에 1·2권 합쳐 모두 1000쪽에 달하는 분량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6살때 부터 시작해 생애 마지막까지 64년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썼다. 해방 전까지는 일본어로 썼고 이후 한글체로 바꾸었다. 이번 책은 1970년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고 이후 2000년까지 내용도 두 권으로 엮어 출간할 예정이다.

1921년 곽옹은 옥산면 병천천옆 금계리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렵사리 초등학교만 마쳤지만 두뇌가 명석해 일제 당시 교원 검정고시에 합격, 스무살 나이로 초등 교사가 됐다. 16살때 시작한 그의 첫 일기는 “1937년 4월1일 목요일 맑음(晴天氣)(음력 2월20일).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내가 학교에 갔다 와 동생과 둘이 고기 잡으러 가서 한 사발 정도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며칠 전 충주에 가셨습니다. 오늘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로 시작됐다.

이어 한 살 더 많은 신부와 혼인하고 모두 열 자녀를 낳아 기르며 헤쳐온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 개발독재 시대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가정과 학교, 지역 및 그 주변 일상이 꼼꼼하지만 꾸밈없이 담백하다.

일제 군국주의 체제 강화를 위한 이념교육에 동원되는 학교와 그 속에 낀 한국인 교사의 무력감, 해방 직후 형편없이 부족한 학교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하는 교사의 생활은 눈물겹다. 전쟁과 복구 시기, 1960년대 각종 정치행사와 일정에 동원되는 학교와 학생, 교사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곽옹의 자녀들은 무탈하게 성장했고 그 가운데 6명은 아버지와 같은 교직을 택해 교사일가를 이뤘다.

아들 노필씨는 “선친이 생각하는 최고의 교육 방식은 ‘칭찬’이었다. 자식들한테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넉넉하진 않지만 기죽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 얄팍한 봉급만으로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교사 부임 직후부터 가계부도 쓰셨다. 한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시작한 가계부를 59년동안 기록하셨다”고 말했다. 노필씨는 선친의 일기 중 한 대목을 소개했다. 1948년 1월3일 저녁에 쓰신 ‘생활의 다짐’이다. 당시 자식 넷을 둔 스물여섯살 가장이었다.

“‘이십전 자식이요, 삼십전 재산’이라는 말이 있으나 한 가지만은 이루었다 할지라도 한 가지가 빠자서 걱정이다. 빠진 것이 아니라 벌지를 못하였다. 나의 욕심이 너머나 과대한 모양이다. 그러나 절대로 부자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부자되는 것을 싫여하지는 않겠지마는 춘하추동 조석으로 목구멍에 풀칠이나 떨어지지 않게 하고, 자식들 교육이나 남들에게 빠지지 않도록 시킬 수 있는 정도이면 만족으로 생각한다. 아니 큰 부자로 생각한다. 이것도 아마 나의 욕심인지도 몰은다. 큰 부자가 되면 무엇하나. 돈에 녹이 실고 쌀에 곰팽이가 찌면은 쓸데없는 부자요 쓸데없는 욕심이요 가치없는 돈과 쌀인줄 나는 믿는다. 부잣사람들은 세상에 자기 혼자이면 부도 빈도 없는 것이다. 사는 땅이 있고, 인류가 있고, 자연의 변천이 있으므로써 부자가 된 것이 아닐까. 모든 자연과 인류사회에 報恩하여야 될 것이라고 나는 역설하고 싶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