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구신화 두번째 이야기

 "고귀한 무예 가문 출신인 저의 아버님께선 할아버님의 뒤를 이어 평생토록 왕족과 귀족 자제들, 그리고 장군 자제들에게 무예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내려주신 명(命)에는 어찌하실 수가 없어 말년에는 그 자리를 제일 큰 아들에게 물려주신 후 병석에 한참 누워계셔야햇지요. 그런데 아버님게서는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막내인 저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제 두 손을 꼬옥 잡아주시며 넌지시 이런 부탁을 하셨드랬습니다. 

저 벽에 걸어놓은 가죽 옷의 안쪽을 자세히 살펴보려므나!

 거기에 표시해 놓은 대로 산을 타고 남쪽으로 쭉쭉 내려가서 어느 넓다란 벌판을 지나게 되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조그만 어촌이 나오게 된다.  그곳에는 젊은 시절 내가 잠시 만나 깊은 연분까지 맺었던 예쁘고 어린 처자가 어쩌면 아직도 살고있을는지 모른다.

 만약 살아있다면 그 처자는 틀림없이 아들이건 딸이건 아이 하나를 낳았을 터...
나는 그때 그 처자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냥 떠나와야했는데,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에 와서 곰곰히 옛일을 생각해보니 그 예쁘고 착했던 처자 얼굴이 자꾸만 내 눈에 밟히는구나!

 나는 그 어린 처자와 헤어지면서 언젠가 꼭 데리러 올터이니 기다리라며 수없이 안심을 시켜주고 다짐도 주었거늘, 세상일이 너무 바쁘다 보니 내가 그만 거짓말을 해버린 셈이 되었구나! 지금 나는 병이 들어 이렇게 두 다리를 꼼짝도 할 수 없는 몸. 이러다 내가 죽는다면 그 어린 처자와의 약속 때문에 내가 마음 편히 두 눈을 감고 지낼 수 없을 것만 같구나.

두 눈을 편안히 감을 수 없을 것만 같구나. 그러니 애비로서 막내인 너에게 부탁을 하노니, 만약 내가 죽거들랑 네가 내대신 산을 타고 남쪽으로 쭉쭉 내려가 그 바닷가 마을로 찾아가 아직 살고있을지도 모를 그 예쁜 처자를 만나보거라. 그래서 내 대신 정중하게 사죄를 한 다음, 그 처자가 낳은 아이가 아들이라면 우리 가문을 우리 가문을 대대로 이어가고 또 나라를 위해 쓰여야할 재목이 되어야할 것이니 부디 이곳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도록 하거라.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네 큰형에게 따로 부탁해 두려마!'

 바로 이런 연고가 있었기에 저는 아버님 장례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산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까지 찾아오게 된 것입지요."

 청년이 하는 말을 지금까지 줄곧 듣고만 있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웬일인지 하나둘씩 창백하게 굳어지고 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나이많은 연장자 노인의 표정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말을 마치고 난 청년은 갑작스런 마을 사람들의 표정 변화에 다소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러나 이에 대해 아무런 내색도 나타내지 않은 채 그저 그들로부터의 다음 반응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이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아까 그 연장자 노인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키가 큰 청년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자네 아버님과 자네의 이름자를 여기서 밝혀줄 수있는가?"

"......."

"설마하니, 아들이란 사람이 자기 아버님 함자를 모르지는 않겠지?"

"......."

"어서, 말해보게나."

"........"

"아니,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

"어허! 어서 말을 하게! 궁금하지 않나?"

 청년이 이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꼬옥 다물고만 있자 말을 꺼낸 노인은 역정을 내듯 큰소리로 다그쳐댔다. 마침내 청년은 주위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들이 어지간히 부담스러웠던지 무거운 입을 천천히 떼며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들인 제가 아버님의 함자를 모를리야 없지요. 하지만 한가지 일 때문에 제가 함부로 입을 열기가 심히 곤란하옵니다."

"......"

"그 옛날 저의 아버님께서 이곳에 처음 오셨을 때, 실제로 본명을 밝히셨는지 아니면 무슨 필요에 의해서 어떤 가명을 사용하셨는지 저로서는 지금 전혀 알 수가 없는 바, 따라서 이것이 제가 아버님의 함자를 말씀드리기가 심히 난처한 까닭이옵니다."

 청년은 이렇게 말을 하며 바로 앞에서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고있는 노인과 자기를 포위하듯 에워싸고있는 마을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럼, 자네는 끝내 아버님의 함자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없다는 건가?"

노인이 이맛살을 크게 찌푸리며 청년에게 확인해 보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보아하니 저의 아버님 함자를 반드시 아셔야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좋아! 그렇다면 이제 자네 이름자를 말해보게나. 자네가 방금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정말로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저 멀리 어느 북쪽 나라 왕족 자제들과 귀족 자제들의 무예를 가르치는 스승 노릇을 하셨다면 이건 필시 귀한 가문일 터인즉, 설마하니 아들인 자네가 천한 것들처럼 이름자도 없는 건 아니겠지?"

노인이 약간 비웃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청년에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저에겐 이름자가 있사옵니다."

청년이 대답했다.

"무엇인가?"

노인이 두 눈을 조금 크게 치뜨며 다시 물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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