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시인을 찾아서 2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9)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 오장환 시인.

이 땅의 모든 길은 고갯길 아니면 멀리 돌아가는 길이라는, 당신의 말은 온당하고도 아름답습니다. 새로 길 내는 일을 필생의 업으로 여기고, 산이 막히면 다짜고짜로 터널을 뚫는 요즘 사람들은 옛 길의 곡진함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테죠. 상주 쪽에서 와 보은 읍내를 우회한 25번 국도는 수리티재를 넘고 회인을 관통하여 피반령을 넘어 청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회인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나 고갯길인 셈입니다.

문의 쪽에서도 염티재를 넘고 남쪽으로 돌아 회남을 지나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고개를 넘지 않는 방법은 최근 개설한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회인면 회인로 5길 12(중앙리 140번지, 속칭 사잣골)가 오장환이 태어난 곳입니다.

오장환의 아버지 오학근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이 일찍 죽자 후사를 걱정하여 첩실을 들였습니다. 오장환은 그 둘째 부인 한학수의 소생입니다. 서자로 태어나 자랐던 성장 환경은 첫 번째 시집 《성벽》에서 반봉건 경향으로 나타납니다.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姓氏譜> 부분) 오장환은 또 <城壁>을 통해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터거리처럼 지저분하도다.”라고 일갈했거니와, 자신의 뿌리부터 통째로 부정하면서까지 유교적 전통과 권위주의를 깨고 싶어했죠.

정지용과 휘문고 사제 인연

그렇다고 그의 성장 환경에 별다른 억압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회적인 부조리에 일찍이 눈을 떴다고 봐야 할까요? 오장환은 세칭 ‘오부잣집’에서 열 살까지 살았는데 이때의 따뜻한 체험이 그의 동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두루루루/두루루루/가는 맷돌은/빈대떡 부치려고 가-는 매./내일은 내 생일./두루루루/두루루루/엄마는 한나절 맷돌을 간다.”(<내 생일> 전문) “누나야, 편지를 쓴다./뜨락에 살구나무 올라갔더니/웃수머리 둥구나무,/죄-그만하게 보였다./누나가 타고 간 붉은 가마는/둥구나무 샅으로 돌아갔지,/누나야, 노-랗케 익은/살구도 따먹지 않고/한나절 그리워했다.”(<편지> 전문) 자신의 생일상을 위해 맷돌을 돌리는 어머니, 이웃 동네로 시집가는 누나를 안타깝게 전송하는 화자의 모습에 맑고 깨끗한 동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 오장환 문학관과 생가. 문학관 앞 시비에는 시 <나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매년 9~10월경 오장환 문학제가 열린다.

오장환이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을 발표한 것이 그의 나이 열여섯, 동시 <바다>를 발표했을 때가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그 예민한 청소년기에 유소년기의 체험을 소재로 쓴 자전적 동시에서는 여러 학자들이 강조하는 ‘초기 시의 서자 콤플렉스’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장환은 회인공립보통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고 안성으로 이사하면서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4, 5, 6학년을 다녔습니다.

14살 때인 193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당시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영어 교사로 있던 정지용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었는데, 정지용의 영향으로 동시를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타향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했던가요? 그래서인지 정지용은 오장환을 유별나게 아껴서 처음 보는 학생에겐 각설하고 “장환이보다 선배냐 후배냐?”라고 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향 까마귀’인 것만 해도 반가운데 시재(詩才)까지 출중하니 선배로서 스승으로서 여간 기껍지 않았을 테죠.

1936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오장환은 김달진, 서정주, 김동리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또 이육사, 김광균 등과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첫 시집 《성벽》에 이어 《헌사》를 간행하여 ‘시단에 새로운 왕이 나타났다’는 찬사를 들었는데, 그 전까지 ‘왕’의 자리에 있던 시인은 다름 아닌 정지용이었습니다.

해방후 월북, 전쟁 중 사망설

당신도 아는 것처럼, 1945년 우리 민족의 광복은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였던 사실 못지않은 비극이죠. 광복과 함께 찾아온 이념의 혼돈 속에서 오장환은 “씩씩한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의 행렬 속에 뛰어들었습니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며 세 번째 시집 《병든 서울》을 펴냈을 때 그의 몸도 신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병든 서울> 중)를 꿈꾸었으나 사회도 자신의 몸도 병든 현실을 확인하며 신음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1943년 발표했던 시 <절정의 노래>가 광복 후 1947년에 발행된 중학교 5, 6학년 교과서에 <석탑의 노래>란 제목으로 실렸거니와,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견디는 탑에 비하면 찰나에 가까운 일생을 사는 존재일지라도 미래를 생각하고 역사적 전망을 찾으려 했던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1947년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을 펴낸 후 그해 겨울 이태준·임화 등과 함께 월북했고, 1951년 전쟁 중에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장환 문학관은 아담한 절집같이 고요합니다. 격렬했던 오장환의 삶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오장환은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으로, 보은에서 서울·평양·모스크바에 이르는 삶의 역정을 담담히 받아들였던 뜨거운 시인이었으며, 아수라의 해방정국에서 실천적 작가로 변모를 거듭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러시아의 시인 예세닌의 시집을 유려한 가락으로 옮겨놓은 유능한 번역가이기도 했고, 좌파적 시각을 가지고서도 소월과 같은 우리 전통시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하고 본격적인 논문을 쓴 문학연구가이기도 했습니다. 얼굴은 또 얼마나 잘생겼게요. 당신도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보기 드문 미남입니다. 생전에 오장환을 만났던 이들이 회고할 때면 으레 그 준수한 용모를 먼저 떠올릴 정도입니다.

제국주의의 압제와 수탈로 헐벗고 척박해진 조국을 직시하며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붉은 산>)이라고 아파했던 시인, 더없이 절망적이지만 고향처럼 버릴 수 없는 운명을 절감했던 시인,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나의 노래>) 노래했던 시인. 그의 노래는 멈춘 지 오래됐는데, 어딘가에 무덤이 있다면 무슨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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