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없는 걸 찾는 게 빠를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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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없는 걸 찾는 게 빠를 거요”
  • 충청리뷰
  • 승인 2016.05.1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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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시장서 잡화점 38년 김동기&이종남 부부
소녀의 기도, 지구레코드, 빛돌이를 아시나요?

토박이 열전(5)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간판은 은광유리다. 그러나 지금은 유리를 취급하지 않는다. 무얼 파는 가게인지 정확하지 않다. 가게 밖 판매대에는 머리핀, 머리띠 같은 액세서리와 머리빗, 참빗 등이 진열돼 있다. 가게 안에는 인형과 액자, 시계, 리본, 면도기, 지갑, 허리띠, 카세트테이프, 멀티탭 등 서로 연관 짓기 어려운 물품들이 빼곡하다. 마실 온 단골손님이 한 마디 거든다. “여기서 팔지 않는 걸 찾는 게 빠를 거예요.”

주인장 김동기(65) 씨는 1978년 북부시장으로 들어왔단다. 괴산이 고향인 부인 이종남(62) 씨는 1979년, 김 씨와 결혼했다. 그리고 은광유리 옆 점포에서 북부음악사를 운영했다. 카세트테이프가 고가(高價)로 팔리던 시절이었다. 2002년 서울월드컵이 열릴 무렵 음악사를 접었단다. 가게 안 한쪽 벽면이 그때 팔다 남은 테이프로 가득 차 있는 이유다. 요들송을 부르던 김홍철의 ‘오리지날 힛송 총결산집’ 테이프가 눈에 들어온다. 김흥국의 ‘59년 왕십리’도 보인다.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발매된 것들이다. 가격표 3000원이 붙어있다.

“시집오자마자 음악사를 시작했어요. 그때는 새벽 5시30분에 문을 열어서 밤 12시까지 장사를 했죠. 테이프하고 판(디스크)을 팔고 비디오는 대여해 줬어요. 악기도 리코더, 하모니카 같은 걸 팔고 유행가 악보도 많이 팔리던 때가 있었죠. 그땐 테이프가 비쌌으니까. 돼지고기 한 근에 1000원, 1300원 하던 시절에 원판테이프는 3000원, 3500원 했어요. B품도 1000원에 팔았고. 딸만 둘인데 애들이 다 타지로 대학을 갈 무렵 음악사를 접었어요. CD가 막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죠.”

원판이라면 당시 오아시스나 지구레코드 등에서 발매된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도 가끔 테이프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다른 물건을 사러왔다가 신기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고, 테이프를 팔고 있다는 걸 알고 작정하고 사러오는 사람들도 있단다. 그런데 주인장 김동기 씨는 시큰둥하다.

“그전에 사가던 사람이라고 찾아오고, 어떻게 알고들 오는데, 정가는 그때 가격으로 3000원, 3500원이 붙어있지만 어디 그 가격을 받을 수 있나? 하나 사면 몇 개씩 덤으로도 주고, 다른 물건 사러왔다가 신기해하면 그냥 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젊은 애들이 부모님 듣던 노래라고 사가기도 하는데, 이걸 뭘 팔려고 둔다기보다는 그냥 우리가 들으려고 두는 거야. 요즘에는 어디 카세트라디오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나?”

주인장이 먼지가 뽀얗게 앉은 김홍철의 요들송 테이프의 포장을 뜯어 카세트라디오에 넣고 버튼을 누르니, ‘요르레이 요르레이 요르레이딧’ 맑고 청아한 요들송이 울려 퍼진다. 스위스 청년처럼 전통복장을 입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던 가수 김홍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안덕벌이 고향인 김 씨는 북부시장 상권이 계속 전성기를 구가할 거라 믿고 27살 나이에 도전장을 던졌단다. 결혼 전 10평짜리 은광유리를 열었고, 신혼의 아내도 함께 음악사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부부는 가게 2층, 30여 평 살림집에서 두 딸을 낳고 길러 시집보내고 앞으로도 이 집에서 금혼(金婚)을 맞을 참이다.

“시장이 생기기 전에 여기를 수안들이라고 했어. 구덩이를 파고 인분 실어다가 부어놓는 큰 똥통이 두 개나 있었고, 죄다 배추농사 같은 걸 지었지. 그때는 여기가 밭 자리였으니까. 그런데 한전이 이리로 들어왔잖아. 한독약국하고 집은 몇 채나 있었나? 그래도 주변 상당경찰서 자리에는 청주방직이 있었고, 청주대학교도 옛날부터 있었고, 그 앞에 한국도자기가 있고…. 여기가 호황이었지. 복개도로 건너편에는 시영주택이라고 있었잖아. 지금도 서너 채가 남아있을 걸. 그때는 공무원들이나 사는 집이었지. 이 동네가 괜찮았었어.”

간판이 은광유리인 것은 개점 당시의 품목이 유리장사였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으로 유리를 사러오는 손님들이 있었다기보다는 학교를 상대로 장사를 했단다. 깨진 유리창을 끼워주고, 책상에 유리를 깔아주는 일인데, 공장에서 유리를 주문처로 보내주면 가서 작업만 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가게에서는 액자 같은 잡화를 팔았던 것이다. 유리장사는 2년 전에 접었다. 가게를 둘러보니 추억 속의 액자들이 이곳저곳에 걸려있다. 이발소에 어울릴 법한 호랑이 액자나 기도하는 서양소녀의 모습은 30년 전에나 유행했던 것들이다. 도자기 인형 중에는 1993년 대전엑스포의 마스코트였던 ‘빛돌이’도 눈에 들어온다. 저걸 알아볼 정도면 최소한 40대다. 부인 이종남 씨의 얼굴에 지난 세월의 소회가 스친다.

“저기 저 유화 같은 것들도 30년은 됐을 거예요. 옛날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들고 다니면서 팔았어요. 그러면 우리가 사서 액자를 만들어서 팔았죠. 그때는 액자를 대량 생산해서 팔지 않을 때니까요. 지금은 뭐 팔아서 먹고사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이렇게 가게 문 열고 세월만 보내는 거예요. 품목을 보면 다이소(1000원 숍)랑 비슷한데 요 옆에 다이소까지 들어왔으니….”

문화를 매개로 북부시장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청년창업을 유도하면서 작은 점포들이 들어서고 있다. 북부시장의 저력이라는 것이 이제는 정육점과 떡집으로 집중되고 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이런 가게들이다. 주변에 점집이나 굿당들이 많이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정설은 아니다. 옛날부터 정육점이 많았다니 말이다. 어찌 됐든 은광유리라는 간판을 걸고 잡화점을 운영할 수 있는 것도 이 가게의 주인장 부부의 내공이다. 40년의 업력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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