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시인을 찾아서 1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8)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옥천의 북쪽에 다다르면 금적산이 길을 막아섭니다. 소싯적에 내가 살던 마을에서 멀리 남쪽 하늘가에 가로놓여 있던 그 큰 산입니다. 금송아지와 금비둘기가 금실 좋은 부부로 살다가 비둘기가 눈먼 송아지를 두고 떠나버리자 아내를 부르다 죽었다는, 산을 다 파내면 금송아지가 묻혀 있다는, 조금은 황당(?)한 설화를 그 옛날 누구한테 들었던가요. 물길이 산을 만나면 굽이굽이 돌아가듯이, 사람의 길도 산을 단도직입으로 넘는 법은 없습니다.

▲ 문장대에서 바라본 속리산 연봉. 오른쪽 멀리 솟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천왕봉은 한강, 낙동강, 금강의 물을 가라는 ‘삼파수’이자 세 문화권이 나뉘는 꼭지점이다.

대개는 물길을 따르거나, 그렇지 못하면 산의 골짜기를 파고들어 그나마 낮은 안부(鞍部)를 찾아 넘게 마련이죠. 안내면 현리삼거리에서 곧장 37번 국도를 따라 덕대산 문티재를 넘으면 보은 수한면이고, 502번 지방도를 따라 금적산 옆으로 정방재(듬치재)를 넘으면 보은 삼승면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요. 나의 고향입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떠난 후 돌아가지 못한, 돌아갈 일 없는 고향, 보은입니다.

“흙이 풀리는 내음새/강바람은/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진종일/나룻가에 서성거리다/행인의 손을 쥐면 따뜻하리라.//고향 가까운 주막에 들러/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양귀비 끓여다 놓고/주인집 늙은이는 공연히 눈물지운다.//간간이 잔나비 우는 산기슭에는/아직도 무덤 속에 조상이 잠자고/설레는 바람이 가랑잎을 휩쓸어 간다.//예제로 떠도는 장꾼들이여!/상고(商賈)하며 오가는 길에/혹여나 보셨나이까.//전나무 우거진 마을/집집마다 누룩을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새…….”(오장환 시 <고향 앞에서> 전문) 이방인이 되어 고향을 찾으며 나룻가에서 행인의 손이라도 덥석 쥐어보고 싶은 마음, 그러나 이내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하고 탄식하고 말았던 오장환의 마음으로 쭈뼛쭈뼛 보은에 발을 들입니다.

한남금북정맥의 ‘삼파수(三派水)’

넓은 원남들과 탄부들 사이로 보청천이 흘러 나가고, 평야 저 끝으로 구병산 줄기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 산줄기가 형제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며 속리산 연봉을 이룬다는 건 당신도 알 것입니다. 이따금 가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속리산은 참 명산입니다. 특히 주봉인 천왕봉을 기점으로 백두대간에서 한남금북정맥이 갈라져 나가며 이른바 ‘삼파수(三派水)’를 이룬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천왕봉에 빗방울이 떨어져서 동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물이 되고, 서북쪽으로 흐르면 남한강을 거쳐 한강으로 가고, 서남쪽으로 흐르면 금강으로 간다는 겁니다. 물길은 곧 문화 권역을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이니 속리산은 세 문화권을 가르는 꼭지점이 되는 셈이죠.

아홉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주로 구봉산으로 불리던 것이 속리산이란 이름을 얻은 내력이 《삼국유사》에 전합니다. 신라 혜공왕 때 금산사 고승 진표율사가 구봉산으로 가는 도중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마차를 끌던 소들이 율사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차꾼이 율사에게 그 까닭을 묻자 율사는 소들이 불심으로 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차꾼은 “짐승들도 저렇게 뉘우치는 마음이 절실한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무심할 수 있으랴!” 하며 낫으로 자신의 머리를 깎고 구봉산으로 들어가니 ‘세속을 버리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불교문화가 지배한 이 땅에는 방방곡곡 고승대덕과 관련한 이야기가 흘러 다닙니다. 오늘날 말로 하자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죠. 이야기는 비록 허구라 할지라도 전해 듣는 이로 하여금 사실보다 더 흥미를 느끼도록 하는 힘이 있죠. 마차꾼이 아니라 밭 갈던 농부라고도 합니다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전하는 이에 따라 불기도 하고 줄기도 하는 게 이야기인 걸요.

▲ 보은 삼년산성.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 분쟁이 치열하던 때의 산물이다. 고려 태조 왕건도 이 산성에서 견훤에게 대패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난공불락의 성으로 전해온다.
▲ 외속리면 장내리 취회 현장. 장내리는 지금도 ‘장안’으로 불리는데, 서울을 장안이라 부르는 데 맞선 것으로 취회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다.

속리산으로 향하는 길가의 삼년산성에 흔한 ‘오누이 설화’가 전해지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입니다. 하여간, 그로부터 100년 후 최치원이 산을 구경하고 남겼다는 시 한 수가 전하는데요.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사람이 도를 멀리 하는구나./산은 세속을 멀리하지 않는데/세속이 산을 멀리 하는구나.(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산 이름의 유래를 굳이 따지자면 이 시구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속리산의 상당 부분이 경북 상주에 걸쳐 있음에도 흔히 보은 속리산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법주사가 보은 땅에 있기 때문일 거라는 당신의 귀띔에 십분 공감합니다. 한국인의 사유 구조가 불교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이기도 할 테죠.

산이 좋다는 것은 유람하기 좋다는 말이고, 산지가 많다는 것은 평지가 적다는 뜻이고 농사짓기가 막막하다는 말일 터입니다. 일찍이 《택리지》에도 “보은은 땅이 매우 메마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대로 보은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짐작할 만합니다. 또 “대추가 잘 되어 주민들이 대추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기도 한다.”고 적었는데, 촌로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보은 처녀들은 대추를 많이 먹어서 입이 대추씨같이 뾰족하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될 만큼 그 이름값이 여전합니다. 십년 전 무렵부터는 자치단체가 앞장서 대추 농사를 장려하고 품종개량과 유통 등 다방면으로 힘쓴 결과 명실 공히 ‘보은대추’의 명색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밭의 칠팔 할은 대추밭이 됐고, 야산을 벌목하고 대추나무를 심는 일도 허다합니다. 씨알이 굵고 단맛이 일품인 보은대추를 맛보지 않고서는 가을이 허전하다고 말하면, 당신은 허풍이 늘었다고 핀잔을 놓겠지요.

‘택리지’에 대추 생산지 기록

어른들에게 ‘보은에서 청주·상주·대전이 각각 100리’라는 말을 자주 들었거니와 예나 오늘날이나 보은은 중부의 주요 도시를 잇는 길목입니다. 1893년에 삼남의 동학교도가 보은으로 모여들었던 것도 이 같은 지리적 여건 때문이라 하죠. 보국안민(保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보은취회는 동학 종교운동의 테두리를 넘어 농민전쟁으로 나아가는 전기를 맞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살은 썩고 피는 굳어 흙이 되겠거니와/그 자리에 머리카락이 뿌리를 내리고/뼈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세월이 흐른 뒤에라도/아, 식어 가는 육신을 찔러 깨우는 솔잎과 더불어/그 날을 기약해도 좋겠느냐./쑥대궁이든 진달래든 소나무든/지상으로 눈을 내밀고/푸르러진 이 땅을 둘러볼 날이 있겠느냐.”(졸시 <북실 불망기> 부분) 가는 곳마다 죽음을 무릅쓴 사람들의 흔적이니, 이 땅에선 목숨을 걸지 않으면 살기가 어려웠던 걸까요? 취회 현장인 외속리면 장내리와 전적지인 보은읍 종곡리 북실 마을을 알리는 푯말로 그 뜻을 다 전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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