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 후 쏟아진 희망의 선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김상수 충북재활원장

 

▲ 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구기성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매일 쏟아지는 신간에서 골라낸 새 책 냄새는 참 좋습니다. 하지만 사놓기만 하거나, 읽다 마는 책도 점점 쌓여갑니다. 손닿는 위치에 두고 이거다 하는 가르침을 내내 펼쳐 볼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현대와 과거, 문명과 문맹의 분류를 수정하게하고, 난제에 대한 답이 과거에 이미 내려져 있었음을 발견하는 가르침은 역시 고전으로 분류한 인류의 오랜 지혜를 통해서입니다. 헤세의 <데미안>은 세계대전의 광기로 패닉이 된 서구사회에 희망의 선물이었습니다.

싱클레어의 성장과정은 인간 삶의 궁극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부모로부터 보호된 세상에서 자란 싱클레어는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데미안을 만나면서 비로소 처절한 내면으로의 귀환이 시작됩니다. 순조롭게 뚫린 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혼란과 부끄러움과 광기, 고통을 받아들이며, 이원성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기성이 가르친 분리를 뛰어넘어 ‘아는 자’로 존재하는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피스토리우스와 에바부인, 베아트리체는 모두 싱클레어가 자기의 궁극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분리되고 왜곡된 앎을 해체하고, 앎의 근원으로 온전히 통합되기 위한 분열과 미완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데미안은 혼란을 가중시키며 궁극의 앎으로 합일시키는 싱클레어의 내적 자신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필요한 시점에 불쑥 나타나서 답을 주기도, 다음의 과제를 던져놓기도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외면하거나, 거부한 심연의 언어를 두려움 없이 만나도록 합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

기성의 이데올로기는 체제에 순종하고, 집단의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개인의 사고(思考)를 강화하고 억압합니다. 그것을 교육의 이름으로 혹은 순리의 이름으로 제도화합니다. 데미안의 자유로움은 제도권의 영역에 묶여있지 않습니다. 신화로 탈바꿈한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새는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해야 하며, 신에게로 날아오르라고 주문합니다.

하지만 그 신은 선과 악의 양면성에 갇힌 신이 아닙니다. 이원성을 모두 포용하는,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개념이 무력화되는 아프락삭스의 영역입니다. 절대선(絶對善)이신 신을 배우기 위해 왜소한 굴레에 갇혀 오히려 선과 악의 대립구도가 고착되고 강화되는 사회 병리적 문화에 대한 엄청난 도전입니다.

서구문화를 견인했던 이성적 인식의 산물인 이원성을 깨버리는 시도는 선과 악, 승자와 패자, 우등과 열등으로 도식화된 그들의 전통에 금이 가게 했습니다. 그로써 그들과 인간을 구원해내는 새로운 빛이며, 희망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길을 잃은 사람은 바깥에서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하고, 그것이 또한 신을 온전히 만나는 길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며, 모든 인간은 어떻든 살아서 자연의 의지를 실현하고 있는 한, 경이로운 것이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인간 속에서 정신이 형상이 되고, 모든 인간 속에서 생물이 괴로워하며, 구세주가 못 박히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감히 지자(知者)라고는 부를 수 없다. 나는 구도자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별 위나 책 속에서 더 이상 찾지는 않는다. 나는 나의 피가 체내를 흐르며 소곤거리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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