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래 전 도의원, 헌병대 구타고문 목격자 증언나와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에 대한 정치권의 논쟁이 뜨거운 가운데 청주 박학래씨(82 전 도의원)가 일제의 강제적인 창씨개명에 맞서 수난을 겪은 사실이 목격자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일제말 청주에서 철도공무원으로 재직했던 문철근씨(79)는 박씨가 헌병대에서 구타를 당한채 경찰로 끌려간 장면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또한 박씨의 본적지에 확인한 결과 호적원본에도 한자 이름만 기재돼 있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따라 박씨의 창씨개명 거부는 일제에 항거한 행위이고 직접적인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항일행적으로 재평가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4일 취재진과 만난 문씨는 60여년전의 기억을 뚜렷하게 되살려냈다. 일제 식민통치 말기인 43~44년경에 문씨는 철도공무원으로 청주역에 근무했다. 당시 여관에서 일을 하던 박씨는 저녁이면 여관이름이 적힌 호롱불을 들고 역앞에서 손님을 기다리곤 했다. “그 분이 매일처럼 밤마다 나오셨고, 내가 열차손님을 맞기위해 개찰구에 나와 있으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곤 하셨다. 나보다 나이가 서너살 위셨지만 늘 몸가짐이 반듯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문씨는 한여름 어느 날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하는 중인데 남주동 향화촌(중국요리점)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헌병대에서 맞고 끌려나온 것인데, 앞에서는 일본 헌병이 일본말로 욕설을 하며 ‘악질 조센짱이라고 몰아부쳤다. 일어나라고 명령은 하는데 얼마나 맞았는지, 도저히 자기 힘으로 일어서질 못하는 상황이었다. 딱해서, 가만히 보니 바로 박선생님아닌가? 깜짝놀라서 헌병에게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고 물어봤다”

-동학으로 일군에 맞선 조부 뜻따라-
 흥분한 일본헌병에게 감히 말을 건넨다는 것은 당시 한국인에겐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문씨는 현지 징용으로 철도공무원으로 발탁돼 제복을 입은 공직자였다. 따라서 일본헌병도 외면하지 못하고 ‘경찰서로 데려간다’고 대답했다. 문씨는 인근에 있던 인력거꾼을 데리고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박씨를 억지로 앞자리에 태웠다. “원래 인력거는 뒤로 타야 끌고가는데 힘이 안드는데, 이 분은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그냥 앞쪽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경찰서로 떠나는 모습을 보고 돌아섰는데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도대체, 그 얌전해뵈는 분이 무슨 큰 잘못을 해서 저렇게까지 당하는가 궁금하기도 하고…”

 이후 몇 달동안 청주역 앞에서 저녁마다 호롱불을 들고 섰던 박씨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그에 대한 기억이 잊혀져갈 즈음, 예기치않게 박씨가 직접 청주역으로 문씨를 찾아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위해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그때 누구하나 거들고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부축을 해 준 것이 너무 고맙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때서야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그 고생을 했느냐’고 물어보니까, 창씨개명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그랬다고 얘기했다. 난 그땐 솔직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일제말에 창씨개명은 당연한 것으로 다들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어나면 부모가 당연히 일본이름으로 올렸고 왜 그걸 반대해서 그 고생을 하는가 의아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이었다.”

 당시 박씨는 창씨개명 거부 이유에 대해 조부가 동학운동에 가담해 항일투쟁을 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참수당했고, 이후 집안이 수난을 겪어 ‘철천지 한’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는 것. 따라서 동학에 참여한 조부의 후손으로 일제에 굴복할 수 없어서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다는 것. 당사자인 박씨는 헌병대 연행경위에 대해 취재진에 이렇게 진술했다. “누가 밀고를 했는지 몰라도, 나를 포함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사람 5명이 헌병대에 끌려왔다. 그중에 2명은 창씨개명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고 나와 다른 2명은 무수하게 구타당하고 경찰로 넘겨져서 교도소에 3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끝까지 거부한 분 중에 괴산에서 오신 상투를 튼 선비도 한 분 계셨다”

-일제작성 호적부에 한자이름 확인-
 취재진은 박씨가 기억하는 괴산 출신의 상투를 튼 선비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가장 유력한 가정은 박동기씨(76 전 충북도교육청 부교육감)의 부친일 가능성이다. 괴산 칠성면 출신인 박씨는 부친인 박학진 옹이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부친은 한학자이셨기 때문에 생전에 유발(상투머리)을 하셨고 칠성면 전체에서 정씨 성을 가진 분과 아버님 두 분이 창씨개명을 안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헌병대에 연행됐었는지 여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박씨의 본적지인 충남 청양군 정산면사무소를 통해 선친인 박준하 옹을 호주로 한 1928년(소화3년) 작성된 원적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원적부의 성명란에는 박씨의 한자이름인 ‘朴鶴來’로 적혔을 뿐 일본명으로 개명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대해 해방이후 반민특위 조사관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인 청주 출신 정철용씨(79)는 “일제말기라면 창씨개명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박옹이 헌병대에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수감되면서까지 창씨개명에 반대한 것은 의로운 항거였다고 본다. 더구나 창씨개명의 반대이유가 조부의 항일투쟁 뜻을 잇는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는만큼 지역에서부터 재평가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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