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의 정지용, 정지용의 옥천 3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7)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정지용의 아명은 지용(池龍)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태몽에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얻은 이름이죠. 지용(芝溶)이란 이름은 후에 강호에 나아가며 스스로 바꾸어 쓴 것입니다. 필명일 수도 있겠고, 아호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름을 바꾸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 시인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을까요?

▲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있는 조헌 선생 사당과 시비. 사당 오른쪽 산 위에 묘소가 있고, 마을 입구에 신도비도 건립돼 있다.

마을 인근의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를 재학 중인 12살에 은진 송씨와 결혼한 정지용은, 졸업 후 바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처가 쪽의 친척 되는 송 참사 댁에 보내져 4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는데, 그의 문학을 관류하는 선비정신은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집 찾아 오는 밤/논둑 길에서 불렀노라.//나가서도 고달프고/돌아와서도 고달팠노라./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팠노라.”(시 <옛 이야기 구절> 부분) 하는 시구는 어린 나이에 남의 집에 가서 공부하면서 느낀 고독감과 고달픔으로 읽힙니다.

정지용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모교인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동안 그는 몸은 떠나 있을지언정 마음은 옥천 고향 마을에 두고 살았다고 해야 옳겠습니다. 유학차 서울과 일본 경도(京都)를 전전하면서도 늘 고향을 그리워했고, 그의 몸에 착상된 옥천의 정경은 실개천처럼 아름다운 시구로 휘돌아 흘렀습니다. ‘지용이즘’으로 표현될 정도로 한국문학사에 놀라운 업적을 이룩한 정지용의 문학은 그의 고향인 옥천을 토대로 배태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장계국민관광지에 설치된 정지용 포토존. 설치물 받침돌 위에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이 새겨져 있다.

옥천 농민 소설가 류승규 문학비

보은 쪽으로 길을 잡고 옥천읍을 떠납니다. 모교에 부임한 후 솔가하여 서울로 이사하는 정지용처럼. 37번 국도엔 벚꽃이 한창입니다. 참 필사적으로 피는 꽃이죠. 굽이굽이 눈부신 꽃길을 가노라면 이게 꿈속이지 싶게 아득해집니다. 꿈이 그렇지 않습니까. 낯익은 곳이다 싶어 둘러보면 생전 처음인 곳에 서 있고, 아는 사람이다 싶어 불러보면 생면부지 낯선 사람이고,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걷는 모양 말입니다. 그냥 떠나자니 류승규(1921~1993)란 이름이 맘에 걸립니다. 당신에게도 낯선 이름일 겁니다. 옥천읍 관성회관에 그의 문학비가 서 있습니다만, 정지용의 빛에 가려 눈여겨보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군북면 추소리에서 태어난 류승규는 한국문단에 흔하지 않은 농민 소설가였습니다. 1957년 이무영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에 단편 <예순이>, <빈농(貧農)>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고, 이후 농촌생활과 연계된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농촌과 농민들의 실상을 형상화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농촌과 도시가 한 테두리 안에서 공존 공생해야 하는 존재임을 직시하도록 경각심을 심어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농기》, 《농지》, 《춤추는 산하》, 《흙은 살아있다》 외 다수의 작품집을 남겼거니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펜으로 떠받치며 일생을 소진한 심지(心志)를 다 헤아릴 길이 없어 민망합니다.

옥천 읍을 벗어난다고 해서 정지용에게서 벗어난 건 아닙니다. 옥천 읍에서 안내면 장계리 국민관광지까지는 ‘향수 30리길’로 명명된 길입니다. 옥천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 정지용은 박용철·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33년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으로 있을 때 이상(李箱)의 시를 실어 등단시켰으며, 1939년 《문장》의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조지훈·박두진·박목월 등 이른바 청록파를 시단에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8·15 광복과 함께 이화여자전문 교수와 경향신문 주간으로서 시보다 주로 시론 류의 산문을 많이 쓰며 ‘모던한 신세계’를 건설하고자 애썼습니다.

▲ 공원 산책로 곳곳에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 시비를 세워 놓았다.

한국전쟁 중 ‘나비’처럼 날아가

그러나 광복기에 빚어진 혼탁한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지용의 삶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일그러졌습니다. 이 시기에 남긴 시 <나비>는 비극적인 앞날을 예견하고 쓴 유언처럼 다가옵니다. “내가 이제/나비같이/죽겠기로/날아왔다/검정 비단/네 옷가에/앉았다가/창 훤하니/날아간다.”― 정말이지 정지용은 6·25 전쟁 와중에 나비처럼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간 곳을 모르고 자초지종도 알지 못합니다. 나비를 좋아하는 당신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간 납북이니 월북이니 하여 이론이 분분하였으나 지금까지 진행된 연구에 따르면 월북했을 개연성은 희박하며, 납북 도중에 폭격으로 숨졌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 현대시의 토양을 일군 큰 별을 분단의 희생양으로 잃었다는 것뿐입니다.

향토자료전시관이 건립돼 있는 장계국민관광지는 방갈로 시설을 갖춘 휴양지이기도 하지만, 모더니스트가 꿈꾸던 ‘멋진 신세계’를 실현해 놓은 정지용 시 테마공원이기도 합니다. 1989년부터 해마다 시상하는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품을 숲속 산책로 곳곳에 설치해 걸으며 쉬며 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비 떼같이 꽃잎 흩날리는 강가, 정지용과 작별하기에 적당한 장소 아니겠습니까.

강을 건너서 곧 안남면으로 빠지면 도농리에 닿습니다. 이곳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이름난 중봉 조헌의 시비가 있어 읽고 갑니다. 두루 알려진 것처럼,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승장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함락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금산전투에서 700여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습니다.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 제/사공(沙工)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석양(夕陽)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한 폭의 풍경화 같지만 시에 깃든 심사는 복잡합니다. 정여립 일파를 물리치라는 내용의 만언소(萬言疏)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와 조정을 염려하는 마음이 지극합니다. 당쟁이나 주장과 관련해서는 시비를 양단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만, 그 마음의 삿됨 여부는 그의 삶과 죽음이 말해주는 게 아닐까요? 성품이 강직했던 조헌은 이후에도 대왜(對倭) 강경책을 주장하는 등 수차례에 걸쳐 죽기를 무릅쓰고 만언소를 올렸는데, 도끼를 머리에 이고 상소를 올린 일화는 유명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헌이 의병을 모을 때 사람들은 ‘도끼 상소’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런 사람이 적을 두려워할 리 없다!” 하며 따랐다고 합니다.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 산에 들에 꽃 피고 초록빛 짙어오는 봄날에 하필 그런 생각이냐고, 당신은 탓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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