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경력, 안덕벌의 유쾌한 이발사 이우정씨
이발사 머리는 누가 깎을까…답은 ‘상부상조’

토박이 열전(4)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이 있다. 정말 그럴까? 너무나 궁금해서 한 스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속담은 사실과 달랐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면도기를 이용해 자기 머리를 깎는단다. 처음엔 서툴러서 베이기도 하고, 고르게 밀지도 못하지만 시쳇말로 ‘○물이 들면’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 속칭 안덕벌 초입에 있는 상희이용원의 이우정 이발사를 보는 순간에도 도대체 저 머리스타일은 언제부터 유지했고, 누가 저렇게 깎아주는지 궁금해졌다. 글로 설명하자면 단정한 단발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인데, 누구를 닮았는지 선뜻 떠오르지는 않고….

“이렇게 하고 다닌 지 40년은 됐지. 수염 기른 것은 한 20년은 됐을라나? 그때는 그냥 기르기만 한 게 아니라 포마드 바르고 드라이해서 잘 넘기고 다녔지. 깎는 거는 서로서로 깎아주지. 한 30년을 깎아주는 친구가 있어. 용암동에서 깎다가 가경동으로 넘어갔는데, 내가 그리로 가고, 걔가 우리 이발소로 오고….”

아하, 속담은 바뀌어야한다. ‘이발사가 제 머리 못 깎는다’고. 그런데 그가 말하는 그때는 남자들의 장발과 여자들의 치마길이를 자로 재며 단속하던 ‘그때 그 시절’이 아닌가.

“이발사들은 문제없었어. 친구들이랑 속리산에 놀러갔는데, 나보다도 짧은 친구들은 죄 깎였지. 나는 포마드를 쫙 발랐으니까. 경찰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그냥 밀기는 아깝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이발사라고 했더니 그냥 넘어가데. 몇 번 걸려도 다 그렇게 넘어갔어. 그런데 예비군훈련 가서는 빡빡 밀렸지.”

사진을 찍으며 앵글 속의 모습을 살피다가 그가 소설가 이외수 씨를 닮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도 웃으며 인정했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사진을 찍을 때마다 자기도 깜짝깜짝 놀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크게 인화한 증명사진을 들고 포즈를 취해줬다.

음성군 금왕읍이 고향인 이우정 씨는 1955년생이지만 주민등록상 나이는 1956년생이다. 어머니가 13남매를 낳았는데 그중에 여덟을 홍역 등 돌림병으로 잃고, 다섯 명만 남았단다. 돌은 넘겨야 호적에 올리던 시절이라 한 살이 준 것이다. 이발사가 된 것은 스물한 살 때다.

“옛날엔 이발사 되는 게 쉽지 않았어. 학과가 엄청 어려웠거든. 200명이 보면 20명은 붙었을라나? 소독학, 위생학, 피부학 이런 것들이 과목인데, 영어단어가 섞여 나왔거든. 그때는 이발소에서 수습으로 3년을 일하거나 학원 6개월을 다녀야만 시험 볼 자격이 주어졌어. 나는? 나는 시험을 안 봐도 자격증이 나오는 1년짜리 고등기술학교를 다녔거든. 고모가 이발기술 배우라고 권유해서 서울 서대문으로 유학을 갔던 거지.”

1975년 3월에 졸업하고, 5월7일엔가 자격증이 나왔단다. 고향에서 한 5,6년 머리를 깎다가 경기도 부천으로 올라가서 또 한 4년을 일했다. 오류에서 역곡 넘어가는 길이 2차선이었고, 부천 시내가 한창 개발되던 때였다. 생면부지의 도시 부천으로 간 것은 애인이 부천에서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이우정 씨는 그 애인과 결혼을 하고 나서 1986년 봄, 청주 안덕벌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는 연초제조창이 문을 닫기 전이라 경기가 좋았지. 지금 이 이발소를 얻어가지고 이발사 두 명을 뒀어. 처음 두어 달은 그렇게 맡겨놓고 나는 외려 시내로 나가 일했어. 두 사람 일당이라야 9000원이면 되는데, 나는 하루에 2만5000원을 받았으니까.”

그가 말하는 시내 이발소는 이른바 퇴폐이발소다. 퇴폐이발소가 성업하던 시절이었다. 잘 되는 집은 안마사로 일하는 여직원들이 열댓 명은 됐다고 한다. 종업원들이 하루 한 말씩 밥을 먹고, 하루 매출이 500만원이 넘는 곳도 있었단다. 이발과 안마에 5,6만원을 받았다니 말이다. 자격증이 있는 이발사를 여럿 고용하는 이유가 있었단다.

“단속에 걸리면 한 달 뒤에 영업정지가 나오거든. 그 사이에 폐업신고를 내고 다른 이발사 명의로 또 개업하고, 간판만 바꿔달고. 그러니까 만날 잡아들여야 그 자리가 그 자린 거지. 두어 달 일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내 이발소로 돌아온 거야. 그때는 여기도 경기가 좋았거든. 사실 퇴폐이발소들 때문에 이발소가 손님을 뺏긴 거야. 애들 데리고 가서 머리 깎을 데가 없으니까 미장원으로 데리고 가고, 젊은 사람들도 미장원으로 발길을 돌리고….”

어찌 됐든 이우정 씨는 한 시절 장사를 잘했다. 셋이서 새벽 6시에 일을 시작해서 밤 10시까지 손님을 받았다. 이발사들에게 일당을 주고도 매일 7~10만원을 챙겨갔단다. 동네 전체가 호시절이었다.

“그때 여기 난리도 아니었지. 나도 그렇게 6개월 일해서 지금 사는 아파트 샀으니까. 여기 땅끔(땅값)도 엄청났어. 평당 900만원은 갔으니까. 지금은 400~500만원이나 받을까? 나도 아침 8시에 나와서 7시까지 하는데 한 달에 200만원을 못 벌어. 하루 네댓 명 깎는 거지, 뭐. 그때 집 사놓은 거, 26년 전에 차 산 거 지금까지 그 집에 살고 그 차타고 다니는 거야. 낚시 좋아하고 술타령해서 돈은 못 벌었어.”

그의 승용차는 1989년식 빨간 프라이드다. 오직 바다낚시를 위해서 산 레저용이란다. 지금까지 무려 26년 동안 단 6만km만 탔는데, 오직 낚시 갈 때만 탔기 때문이란다. 한 가지 재주만 배웠고, 4.5평 이발소와 차 한 대로 평생을 산 그의 인생이 참 경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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