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의 정지용, 정지용의 옥천 2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6)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정지용 <향수> 부분)

▲ 옥천읍 관성회관에는 시 <향수>와 <유리창>을 새긴 시비와 함께 정지용 시인의 흉상이 건립돼 읍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시비 앞에 한참 서 있습니다. 길어도 다 읽지 않고는 발걸음을 옮길 수 없을 만큼 글이 좋기도 하거니와, 읽다 말고 간다면 ‘향수’의 고장이 된 옥천에 대한 결례가 되지 싶기도 합니다. 각 연의 끝에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구가 반복된다는 건 다 아는 것입니다. 그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전설이 돼버린 고향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 벗은 아내”란 시구에 마음이 끌린다고 했었죠. 나는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란 하늘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하는 부분에서 무릎을 칩니다.

정지용의 시 <향수>가 노래로 만들어져 발표된 것이 1989년의 일입니다. 납북 및 월북 시인과 그들의 작품에 대해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것이 1988년이니,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작곡가 김희갑 씨가 곡을 썼고, 가수 이동원 씨와 테너 박인수 씨가 함께 불러서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무뚝뚝한 당신도 가끔 흥얼거리는 노래이니까 국민가요라고 할 만하지요.

꿈엔들 잊지못할 고향 노래

이제 정지용과 <향수>를 빼고는 옥천을 설명하기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헐려 없어진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지어 개관하고, 읍내에 세워진 시비만도 몇 개인지 얼른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옥천 문화예술의 메카인 관성회관에 가면 시 <향수>와 <유리창>을 새긴 시비와 함께 흉상이 읍내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고, 정지용이 어린 시절 다녔던 죽향초등학교에도 동시를 새긴 시비가 있습니다. 해마다 5월, 시인의 생일 무렵이 되면 지용제가 열려 거리마다 시인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문학제, 심포지엄, 백일장, 생가예술제와 같은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집니다. 문화예술 단체를 비롯해 관내의 각 분야 모든 단체들이 참여해서 정지용의 이름으로 농산물을 팔고, 정지용의 이름으로 전을 부치고, 정지용의 이름으로 노래자랑을 합니다. 서울역에서 ‘문학관광열차’가 옥천까지 운행되기도 하는데요,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 내로라하는 시인·작가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노닥이는 풍경을 당신도 상상할 수 있겠지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벤트로 기억될 겁니다.

▲ 정지용 생가 인근 상계리에 조성된 정지용 문학공원. 2011년부터 49억원을 들여 13개의 시비와 안내비 등을 세웠다.

최근에는 상계리 쪽 교동저수지 인근 언덕에 문학공원을 새롭게 조성하고, 정지용의 시와 국내 유명 시인들의 시비를 건립해 놓았더군요. 다리가 아프도록 둘러보노라니 자치단체의 열정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시인의 생가 앞에 서 있노라면 방문객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어머! 이게 그 실개천인가 보다.’ 미루어 짐작하기는 예사이고, 아이에게 ‘봐라. 이게 그 실개천이야.’ 단정 지어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을 뒤로 마성산이 둘러서 있으니 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실개천을 이루어 생가 옆을 지나갔을 수도 있을 테지요. 그러나 그게 전부라면 <향수>는 문학작품이라기보다 기록물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겁니다.

문학관광열차, 서울-옥천 운행

<향수>는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되었는데, 정지용이 스물두 살 되던 해 일본 유학을 앞두고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년시절의 꿈과 동경이 숨쉬고 있는 공간이며 늙으신 아버지와 순박한 누이와 그저 평범한 아내가 살고 있는 곳, (어쩌면 지용이 서울에서 이 시를 쓰고 있는 그 밤) 가난하지만 정겹고 따뜻한 가족들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을 고향집, ‘차마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을 빼어난 모국어로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풍경은 단순히 옥천읍 하계리의 그것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침탈로 해체되어 가는 농촌 공동체이자 한국인의 심상에 각인돼 있던 보편적인 고향의 마지막 정경이 아니었을까요? <향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은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정지용이 10여 년 뒤에 발표한 작품 <고향>은 <향수>와 사뭇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외로운 유학생활을 통해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절감한 지식인의 눈을 갖고 돌아왔을 때, 고향은 비애로 가득 찬 공간이었습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생가가 있는 구읍 마을에서는 어느 골목을 들어가든 정지용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인의 고향, 옥천이 돼야

‘실개천’이 하계리의 것만이 아니듯 ‘뫼끝’ 역시 하계리의 것만은 아닙니다. 20년이 넘도록 ‘실개천’이란 낱말 하나에 붙들려 제자리에서 맴도는 형편이라면, 수많은 예산을 쏟아 부어 시인을 기린다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짚어 봐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돈 쓰는 구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노파심일까요? 우리 사회는 모든 일을 경제논리로 설명하고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주민들은, 생가와 문학관을 찾아온 사람들이 내 식당에서 밥이라도 한 그릇 먹어줄 때 그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단박에 ‘정지용이고 나발이고 그게 밥 먹여 주느냐’며 시비를 붙을 게 뻔합니다.

테러방지법으로 테러를 방지할 수 없다는 데에는 당신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문학진흥법으로 문학을 진흥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예술이라면, 그것을 목적으로 여기는 사회적 토대 위에서 피어나는 꽃 같은 것이지 법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종 간이든 민족 간이든, 그게 뭐든 서로 살아가는 방식이 천지 차이라 하더라도, 테러를 자행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사회적 바탕을 구축할 때 테러가 줄어들 것이라는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바랍니다. 자치단체에게나 주민들에게나 정지용이 경제 활성화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자랑스러움의 대상이 되기를. 시인이 살아서 간직했던 시심과 정신을 적극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옥천이 진정한 한국인의 고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것이 이 땅 사람들의 가슴에 사철 아름다운 실개천이 흐르게 해준 시인에 대한 보답이요 예우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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