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혁 보은군수, 충북대 재학시 4월 학생운동 주도해
서울 4·19묘역 20여년째 참배, 청주 기념탑 건립 참여

▲ 청주 4.19학생 혁명기념탑은 정 군수가 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참여해 건립에 적극 참여했다. 지난 16일 기념탑을 찾아 직접 헌화 참배했다.

4.19 혁명 55주년을 맞았다. 조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떨쳐나선 그날의 젊은이들은 이제 70대 중후반의 노인이 됐다. 충북에서도 청주, 충주에서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청주에서는 고교생들이 3월 내내 산발적인 시위를 감행했으나 학교 측과 경찰의 제지로 교문밖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히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르면서 학생시위는 걷잡을 수없는 상황이 됐다. 4월16일 청주공고생 200여명이 청주역(현 청주시청 인근) 광장에 집결해 첫 시위를 벌였고 18일 연합시위로 확대됐다. 청주공고와 청주농고, 청주상고(현 대성고)를 중심으로 3천여명의 학생들이 대거 참여했다.

고향 투표소 부정선거 눈으로 목격

청주대도 18일 학생 350여명이 강당에 모여 학도호국단 김현수 총무부장(79·현 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장)의 연설을 듣고 정문을 나서 시내까지 행진했다. 김현수 회장은 “충북대 학도호국단 간부와 20일 대학 연합시위를 약속했는데 경찰이 이미 눈치를 채고 막으려고 해 18일 청주대 단독으로 가두시위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때 충북대에서 학생시위를 조직하며 활동한 주인공이 정상혁 보은군수(74)였다. 당시 임학과 1학년 과대표였던 정 군수는 독재정권 퇴진을 위한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청주대와 연합시위가 불발이 됐고 경찰의 감시가 더 삼엄해 지면서 충북대의 가두시위는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정 군수는 비상한 시국을 맞아 청주대 학생 지도부와 결합해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대학 1년생이 낯 선 다른 대학 선배들 틈바구니에서 학생운동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우린 고등학교 때부터 시국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눴다. 내가 청주농고 학생회장 때 시내에서 정기적으로 고교 회장단 모임을 가졌다. 여학교 회장도 있었고 주로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패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당시 야당 지도자인 신익희·조병옥 선생 같은 분의 청주 유세 때는 고등학생들도 꽤 많이 참가했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3.15 부정선거가 벌어졌는데 혈기와 정의감이 넘치는 젊은 나이에 어찌 가만 두고 볼 수가 있겠는가?”

보은군 회인면이 고향인 정 군수는 실제로 고향 투표장에서 부정선거의 실상을 눈으로 목격했다. 투표장 길목에는 막걸리 한사발 걸칠 수 있는 자리를 차렸고 고무신짝이 나돌아 다녔다. 더 한심한 것은 촌로들의 투표용지를 일일이 확인하고 투표함에 넣는 장면을 보게 된 것. “학교 주변에 무슨 단체 사람들인지 군복을 입혀놓고 총까지 들고 서 있었다. 투표장에 들어가보니 앞에 어르신들이 용지를 펴서 감독직원한테 보여주고 투효함에 넣고 있었다. 화가 나서 ‘도대체 민주국가에서 이런 투표가 어디 있느냐’고 큰소리로 항의했다. 투표장 직원들이 날 잡으려 몰려들었는데 우리집을 잘아는 면직원이 재빨리 나서서 밖으로 끌고나갔다. 까딱했으면, 그때 충북 학생구속 1호가 될 뻔했다”

청주로 돌아온 정 군수는 3.15 부정선거의 실상을 알리는데 주력했고 선거무효를 위한 학생시위를 준비하게 된 것. 전국적으로 반발이 확산되는 가운데 마침내 4월 19일 분노에 찬 3만명의 대학생과 고교생들이 서울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그날 경찰의 발포로 서울에서만 약 130명이 죽고, 1천여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전국 사망자 185명)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4월 26일 이승만은 사임을 발표했고, 허정의 과도 정부가 수립됐다.

▲ 매년 4월이면 빠짐없이 서울 수유동 4.19 민주묘지를 참배한다.

최고 권력자 육인수 의원 제안 사절

하지만 도청·경찰청 간부들이 구속당하는 등 치안과 정국이 뒤숭숭했다. 이때 청주에서는 범시민수습대책위가 구성됐고 학생대표로 김현수 회장이 임명됐다. 또한 충북대에서는 정 군수가 대책위원으로 참여해 관내 곳곳을 돌며 시국안정 강연을 하게 됐다. “그때 우리 대학생 위원들이 청주 시내 여관 방에 머물며 낮에는 시국강연을 하러 다녔다. 도심을 벗어난 농민들은 정국변화가 어떤 지 캄캄한 분들도 많았다. 그래서 ‘이 박사는 하야했고 새로 국회의원도 뽑고 대통령도 뽑아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알리고 다녔다”

4.19 직후 상황에 대한 김 회장의 기억도 정 군수와 일치한다. 김 회장은 “당시 대학생 책임자 역할을 맡았는데 경찰 지프차를 타고 다녔다. 운전기사와 비서까지 제공받았다. 정 군수가 비록 1학년이었지만 강단있게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정 군수가 일찍부터 사회문제에 눈을 뜬 것은 누구로부터 영향받은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생회장을 줄곧 맡으면서 정치사회적 이슈에 저절로 관심을 쏟게 됐다. 특히 고향을 떠나 청주사범병설중학교로 입학하면서 한국사회의 모순을 깨닫게 됐다. 청주농고 재학중에는 선거때마다 유세장의 최연소(?) 단골 손님이었다는 것.

4.19 역사의 현장을 경험한 정 군수는 대학 졸업후 진로를 농촌 근대화의 일꾼으로 정했다. 스스로 ‘농민의 자식’임을 강조해 온 그는 농촌지도직 공무원 7급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65년 발령 대기 기간에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처남인 육인수 의원이 총선을 앞두고 보은 출신의 젊은 인재였던 정 군수를 영입했다. 육 의원의 두터운 신뢰를 받은 정 군수는 당선이후 서울 국회 사무실에서 일하게 됐다.

“당선이후 서울 국회까지 따라 갔는데 정치권 한가운데 있다보니 회의감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보류했던 농촌지도직 발령신청을 다시 했고 67년에 중원군 농촌지도소 산척지소가 첫 부임지가 됐다” 마지막까지 만류하던 육 의원은 중앙정보부나 KBS 입사를 제안하기도 했다고. 소신을 꺾지 않은 정 군수는 도농촌진흥원, 중앙 농촌진흥청 공무원으로 13년간 재직하다 환경청을 거쳐 사업가로 변신한다. 15년간 성공한 재경 영동 출신 CEO로 활동하다 2002년 제7대 충북도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다시 청운의 꿈을 펼치게 된다.

“공직생활 중에도 홍보영화 촬영까지 안해본 것 없이 다해봤다. 농촌과 농작물에 대한 환경오염 피해의 심각성 때문에 환경청을 자원신청해 전직하기도 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없는 도전정신은 4.19 세대의 특별한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시대와 역사를 바꾸는 데 앞장섰던 그때의 각오와 정신을 생각하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해마다 4.19 묘역 참배를 거르지 않고 있다”

4.19 세대의 자부심이 자신을 키운 8할이라고 여기는 정 군수는 충북 4.19혁명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매년 4월이면 지난 93년 조성된 서울 수유리 4.19민주묘역을 거르지 않고 참배하고 있다. “청년실업 등 사회적 무게 때문에 의기소침한 요즘 젊은이들이 4.19 혁명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힘을 얻기 바란다. 포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면 현실은 우리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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