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지구(운동동)…선사시대 유물 간직한 수천년 자연부락
방서지구(평촌동)…경주 김씨 집성촌, 1700년대 문서 기록

이윤 획득이 판단의 최고 기준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지독한 양면성을 지닌다. 지역 곳곳에서 진행되는 재개발과 재건축, 택지개발과 도시개발 등 이윤 획득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가진 개발행위는 개발이익을 얻는 자와 개발 피해를 입는 자를 동시에 양산한다.

한국전쟁에 의한 분단으로 고향을 갈 수 없게 된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실향민(失鄕民)이라 부른다. 이제 실향민의 사전적 의미는 확대돼야 한다. 토지개발행위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향에서 내쫒기는 현대판 실향민이 계속해서 늘고 있기 때문이다.

개발행위란 거대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시골마을에서는 어디에서도 옛 기억을 찾을 수 없다. 그래도 원주민들은 생판 남처럼 모습이 바뀐 고향이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맴돈다. 마을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그나마 돌아올 수 있는 사람들은 낫다. 농촌마을에서 근근이 살던 사람들은 돌아올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손에 쥔 토지보상비는 고향에서 살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9대째 운동동에서 살았다는 양대현 씨. 마을이 사라진 현재까지 20년간 통장 일을 보는 양 씨는 만감이 교차한다. 사진/육성준 기자

 

청주지역 최대 규모 택지개발지역인 동남지구, 25번 국도를 경계로 두고 마주한 방서도시개발지구는 같은 듯 다른 형태로 택지개발이 진행 중이다. 이미 철거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두 곳은 올초 마지막 이주를 끝냈다. 이제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오면 이곳은 새로운 주민들이 정착하게 되겠지만 원주민 상당수는 돌아오지 못할 전망이다.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지금까지 청주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택지개발이 진행됐다. 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지역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수백년전 형성된 자연부락이라는 점 때문이다.

동남지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동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년전 발굴작업에서 이 지역에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통일신라시대 돌무덤은 물론 조선시대 건물터도 대거 발견됐다. 선조 38년(1605년)에 세워진 청주 한씨 시조제단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69호)도 현존하고 있다. 한마디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마을인 것이다.

1996년부터 최근까지 20년간 통장을 맡아온 양대현(71) 씨는 만감이 교차했다.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그는 “9대 조부 산소가 이곳에 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양 씨는 “다리골(운동동)에 처음 정착한 것은 방 씨라고 들었다. 이후 남원 양씨가 이주해 왔고, 인근 송암에서 밀양 박씨들이 이주해 와 이웃을 이루고 살았다”고 설명했다.

다리골과 백운동·비선거리, 3개 자연부락으로 이뤄진 운동동은 100여 가구가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 산으로 둘러쌓인 동서로 긴 마을 형태에서 알 수 있듯 농경지 면적이 넓지 않았다. 당연히 부농도 없었다. 기껏 몇 마지기의 논과 밭을 경작해 생계를 이어나가는 풍족하지 않은 삶이었지만 일가 친적들과 어울려 부족한지 모르고 만족하며 살던 사람들이었다.

수천년 이어온 시골마을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2003년, 청주시가 인근 월오동에 혐오시설인 목련공원을 설치하면서 인근 개발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마치 주민들을 위한 것인 양 포장된 개발계획 발표에 정작 신난 것은 투기세력들이었다. 100여 가구가 살던 조용한 마을에 외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년 만에 운동동 세대수는 400세대로 늘어났다. 그때 이미 예전 운동동은 사라진 것이다.

 

“돌아올거야. 고향이니까”

운동동 마지막 부녀회장인 오미영(62) 씨는 30여 년 전 이 곳으로 시집와 작은 과수원을 돌보며 평생을 보냈다. 개발로 과수원 배나무는 뽑혀 나간 지 이미 오래다. 그의 남편 이찬우(63) 씨는 다른 이웃과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이 씨 부부는 보상비로 인근 지북동에 작은 경작지를 마련했다. 오 씨는 “평생 농사를 지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 그래서 가까운 용암동으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차타고 농사 지러 다닌다”고 웃으며 “남는 게 있겠냐”고 되물었다. 오 씨는 “아파트가 들어서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고향이니까”라고 말했다.

이웃동네인 평촌동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 18일 평촌동에서 오구진(76) 씨를 만났다. 개발이 한참인 평촌동은 주민 모두가 떠나고 보신탕집 한 곳만 남아 마지막까지 영업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으니 족히 150년은 됐을 거라는 오 씨는 지난해 11월 27일, 고향 떠나던 날을 잊지 못한다. “다 갔지 뭐. ○○는 빌라 사서 갔고, ○○는 꽃다리로 갔어. ○○네, ○○네는 그래도 한 아파트에 살아서 그나마 낫지.” 평생을 같이 살아온 이웃은 사촌 이상으로 가까웠다.

이 마을에 처음 뿌리를 내린 이들은 경주 김씨 일가였다. 경주 김씨 감사공파 종회에 따르면 첫 이주 기록은 없지만 조선 영조 후반(1750~1778) 이 마을에 경주 김씨 일가가 모여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현도면에 거주하던 오 씨들이 다수 들어왔고, 다른 성씨들도 이주해와 80여 가구가 살던 농촌마을이었다.

분평동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오 씨는 며칠에 한 번씩 자전거를 타고 고향 앞을 지나간다. “지북에 밭이 조금 있어. 고구마를 심으려고 비닐을 덮어놨는데 지난 밤 바람에 날려갔나 싶어 둘러보러 가는 길이야”라고 설명했다. 옛 이웃들과 왕래를 하냐는 질문에 그는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데, 별 볼일없이 찾아가면 뭐해”라면서도 “심심하지, 옛날 같지 않고 집에 있으면 심심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