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도 잊힐 리 없는 한국인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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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도 잊힐 리 없는 한국인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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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4.1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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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의 정지용, 정지용의 옥천 1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5)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말을 당신에게서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좀 과장하자면 봉사가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경이로움이었다고 할까요?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산과 강을 이해하는 원리이자 땅을 읽는 기준이었습니다. 산과 강을 한 몸으로 본 선조들의 지리학에 통달한 건 아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금강수계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 옥천읍 죽향리(구읍)에 있는 정지용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

전북 장수 신무산 계곡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북서 방향으로 흘러 금산·영동을 지나 옥천에서 보청천을 받아들이고 신탄진에서 갑천을 만나고, 부강에서 미호천과 합류하면서 서남향으로 틀어 공주·부여를 거쳐 서해로 들어갑니다.

비단처럼 아름답다 하여 보통 ‘금강[錦江]’이라 합니다만, 실은 그 물줄기를 따라 구간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죠. 『택리지』에는 금강의 상류지역을 적등강이라 하고, 공주 부근을 웅진강 또는 금강, 그 아래를 백마강으로 적었습니다. 옥천읍은 그 적등강을 동쪽으로 끼고 번성한 고을입니다.

송시열 ‘송자(宋子)’ 또는 ‘송자(宋者)’

옥천 사람이며 조선 초기 문인이었던 남수문이 일찍이 옥천향교루 기문(記文)에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푸짐하다.’고 적었을 만큼 옥천은 전통적으로 농업이 성한 지역입니다. 보은에서 흘러온 보청천에 기대어 군내 최대인 청산평야가 발달했고, 금산에서 흘러온 서화천(옥천천)이 이루어놓은 옥천평야도 비옥하기로 이름났습니다.

대전·청주시민들의 식수원인 대청호를 품고 있는 까닭에 개발규제구역이 많아 속병을 앓는 사람이 적지 않을 텐데요. 아마도 당신은, 그나마 강산이 제 모양을 유지하는 걸 다행으로 여길 테지요. 1번 국도를 비롯해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충주~남원, 보은~금산, 대전~대구를 잇는 국도가 지나니 교통 요지라 할 만합니다.

특히 대전~대구 간 국도가 확충된 이후 대전광역시와의 경계가 모호해져 대전 생활권으로 편입되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대전과 통합 논의가 나온 것이 벌써 오래 전이고 주민들 여론도 상당수 찬성하는 눈치이니 필경에는 그리 될 것입니다.

▲ 생가가 있는 구읍 마을에서는 어느 골목을 들어가든 정지용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옥천이 시인 정지용을 낳은 땅인 건 이제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죠. 멀리는 조선 초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어 ‘신 사육신(新死六臣)’으로 불리게 된 김문기와 인조·효종 연간의 거유(巨儒) 송시열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합니다. ‘맑은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서 영특한 인재들이 나온다.’는 남수문의 헌사가 빈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이름이 거론되었고 사후에는 전국 40여 개 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걸출한 정치인이고 유학자이자 경세가였습니다. 효종 급서 후에는 거의 관직을 받지 않았지만,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사림의 여론이 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물론 조정의 대신들조차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할 정도였다 하니, 왕이 부럽지 않은 실력자였던 셈입니다. 어떤 지위에 오르고 어떤 권력을 갖는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 힘으로 어떤 일을 했는가가 중요한 거라고 당신은 늘 말했죠.

송시열의 영향력은 공익이 아니라 주로 당파의 이익을 위해 사용됐다고 평가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국 유학사에서 송시열처럼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상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 있을까요?

일각에서는 사문(斯文)의 종사(宗師), 정계의 대로(大老), 아동(我東)의 주자(朱子),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추앙하는 반면 한편에서는 당쟁의 화신, 골수적인 사대주의 신봉자, 극단적인 권력 추구자 등으로 비난합니다. 추앙하는 쪽은 ‘송자(宋子)’라 부르고, 비난하는 쪽은 ‘송자(宋者)’라 부릅니다. 전자는 공자·맹자·순자 등에 붙이는 최상급의 경칭이고, 후자는 욕할 때 놈이라고 하는 최하급의 비칭입니다.

▲ 금강 상류의 옛 이름은 적등강이다. 이원면 적등진나루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추풍령을 넘고 금강을 건너 서울로 가던 중요한 길목이었다. 지금은 경부선 철도가 놓여 나루를 대신하고 있다.

김문기 ‘신 사육신 논쟁’

구룡촌의 이웃마을인 백지리는 적등진나루가 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에 추풍령을 넘고 금강을 건너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지금은 경부선 철교가 놓여 나루를 대신하고 있죠. 백지리 출신인 김문기도 치열한 논쟁의 주인공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1426년(세종 8)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무예에도 능하여 명궁으로 이름이 났었다고 합니다. 단종 복위 사건 때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로서 군 동원 책임을 담당하였다는 혐의로 세칭 사육신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사육신’이란 말은 원래 남효온이 <육신전>을 쓰면서 그 절의를 평가하여 기록한 데서 비롯된 것인데요. 1977년 극작가 구석봉이 ‘<육신전> 중 유응부와 관련된 내용은 김문기의 사실을 잘못 기재한 것이므로 사육신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를 넣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되어 국사학계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으니, 이른바 ‘신 사육신 논쟁’입니다.

당시 이러한 주장을 수긍했던 국사편찬위원회는 노량진의 사육신공원 내에 김문기의 허장(虛葬)을 묵인했지만, 《조선왕조실록》의 해석을 둘러싸고 학계 의견이 계속 엇갈리자 재심의 끝에 ‘종래의 사육신 구성을 변경한 바 없다’고 결론짓고 ‘김문기 선생을 현창한다’는 것으로 5년간의 논쟁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회의 역사적 평가에는 늘 석연찮은 논쟁이 뒤따랐습니다. 사회적 합의보다 혈연·지연·당파를 앞세우는 경향 때문일 것입니다. ‘신 사육신 논쟁’에도 일면 영동 출신인 구석봉의 애향심이 개입됐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당사자의 신념과 무관한 논쟁이고, 사육신에 들지 못했다고 그 절의가 반감되는 건 아니어서 공의 경중(輕重)을 가리는 게 무의미할 테니 말입니다. 세상의 평가는 늘 오류 가능성이 있고 이율배반적이어서 다 믿을 수 없다는 당신의 탄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육신의 충절을 높이 사면서도 권좌를 차지한 수양의 대세를 인정하는 민심, 그 감성과 이성, 명분과 실리의 거리는 일도양단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 명암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자 현직 대통령의 어머니인 육영수의 생가를 둘러보며 그 ‘으리으리한’ 영화(榮華)를 부러워하는 관광객의 마음도 같은 종류가 아니겠습니까. 정지용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 구읍(舊邑)에 도착해 맛집으로 소문난 문정식당부터 들러 짬뽕으로 배를 먼저 채우는 나의 가벼움조차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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