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권력구조의 성격을 떠나 보통선거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은 물론 선거다. 특히 민주국가에선 오직 선거만이 정권교체라는 합법적 반란(?)을 보장받을 수 있다. 선거혁명이라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1962년 네윈의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미얀마의 53년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힘은 바로 세계의 감시속에 치러진 총선이었다.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야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군부 주축의 기세등등하던 독재권력을 궤멸시킨 것이다. 만약 선거라는 우월적 장치가 없었다면 반세기의 내공을 쌓은 군부독재는 피를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냥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대만 역시 올 초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정권이 바뀌었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동산 가격 폭등, 그리고 중국과의 경제교류 실패라는 이른바 3대경제실정이 빌미가 돼 국민당의 8년 집권이 퇴출되고 대 중국 독립성향의 민주진보당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금까지 대만은 모두 세 차례의 정권교체를 기록했는데도 국가적인 큰 혼란은 없었다. 선거라는 제도적 절차에 따른 국민적 공감과 또 그 결과에 대한 패자의 승복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반대세력에 대한 온갖 정치적 탄압과 그로 인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뒤에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지난 정권교체와는 분명 다르다. 어찌보면 대만의 정권교체 이력은 민주국가 체제에서의 선거혁명이라는, 그 진수를 그대로 보여주고도 남는다. 그곳 국민들은 국정 실패에 대한 응징을 표로써 정확히 보여줬고 그 결과는 여야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국가체제의 시험을 가능케 한 것이다.

4.13 총선이 끝나자마자 여론은 곧바로 내년 대선으로 쏠리고 있다. 막가파식 정치담론을 양산하는 종편의 부추김이 한 몫 했겠지만 현재의 분위기라면 차기 대선정국은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실은 4.13 총선 자체가 내년 대선구도로 치러졌다고 봐야 옳다.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한 분석 중에 유독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가 자민당의 영구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일본을 닮아갈 것이라는 예단이다. 각종 악재 속에서도 새누리당이 제1당이 되기까지는 다름아닌 여당의 영구집권으로 굳혀지고 있는 일본형의 정치문화가 알게 모르게 우리나라에도 점차 형성되고 있다는 데 착안한 발상이다.

언론보도 등을 통해 잘 알려졌듯이 1955년 결성돼 61년의 역사를 가진 자민당은 이미 오래전부터 과거 진보에서 극우까지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졌던 정당이 더 이상 아니다. 지난날에는 파벌연합체라는 닉네임을 받을 정도로 자민당은 정치적 다원성으로 상징됐지만 이후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은 오로지 최고 자리인 총리의 의향과 눈치만을 살피는 해바라기 정당이 된 것이다. 아베 총리가 헌법을 뜯어고쳐 전쟁이 가능한 일본을 재건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연히 일본의 당정 관계도 당고정저(黨高政低)에서 지금은 정고당정(政高黨低)로 확 바뀌어 국정 현안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입김은 이젠 고스톱판의 흑싸리 껍데기 신세가 됐다.

새누리당의 이번 20대 총선 과정을 보면 어찌 저렇듯 일본을 닮아갈까? 머리카락이 솟구칠 정도다. 명색이 행정부를 견제하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인데도 모든 것이 대통령에게만 초점이 맞춰졌다. 대통령의 미움을 산 인물은 공천은커녕 아예 당에서조차 쫓겨나야 했고 당을 대표해 총선을 이끌어야 할 사람들은 오로지 대통령이라는 주군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했다.

더 황당한 것은 상황이 불리해지는 순간 새누리당의 선거전이 온통 ‘대통령 구하기’로 급변침한 현실이다. 비박과 반박에 대한 공천학살을 자행할 때만 해도 기고만장하던 그들이 돌연 변신을 해 길바닥에 무릎을 꿇면서까지 “대통령을 살려주세요”라며 읍소한 것도 기가막히거니와 결국 이것이 유권자에게 약발을 발휘해 새누리당에 승리를 안긴 전후과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할 뿐이다.

만약 우리나라에도 1당 영구집권의 조짐이 보인다면 여당의 이러한 기현상에 대해 야당은 물론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너무 무감각하다는 데서 더 큰 귀책사유를 찾아야 할 듯 싶다. 과거에는 독재와 민주라는 확실한 선거의제를 공유하면서 3김 시대로 상징되는 강력한 리더십에 유권자들이 환호했다면 지금은 도토리 키재기식의 야당 지도자들만 넘쳐나고 그나마 두, 세쪽으로 갈라져 총선을 치렀으니 유권자의 눈길을 끌리가 만무하다.

보수언론의 맹활약에 힘입어 우리나라 국민들이 천박한 정치담론에 지나치게 빠져들면서 상대적으로 균형된 정치논리에는 점차 무지해지는 것도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집권당을 무너뜨리는 데 한계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젊은 층들의 참정의식이 날로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선 선거는 더 이상 정권교체를 도모하는 ‘합법적 반란’의 수단이 안 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권력창출이 일본을 닮아간다는 얘기는 결국엔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어느덧 플라톤이 우려한 ‘우매한 대중‘이 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잔인한 4월에 치러진 이번 총선은 그래서 끝까지 그 잔인함의 잔영(殘影)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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