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메고 식당 돌며 ‘이철남의 56년 노래인생’
풀린 기타줄, 박자는…언제부터 맞지 않았을까?

토박이 열전(3)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권불십년화무십일홍(權不十年花無十日紅)’이라고, 10년 가는 권력이 없고 열흘 붉은 꽃도 없단다. 인기를 먹고 사는 가수들은 어떨까?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국민가수 김정구(1998년 작고)나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가왕 조용필 정도나 돼야 반백년을 무대에 선 주인공으로 기록될 것이다.

요즘 아이돌은 10년 뒤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팀플레이로 노래를 부르니 개인경쟁력을 가늠할 수 없다. 곡예에 가까운 춤을 추는데 유연성과 체력이 언젠가 한계에 직면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리듬과 안무는 20대일 때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한국형 헤비메탈의 전설 유현상이 어느 날 트롯가수로 변신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가 아닐까?

기타를 둘러메고 청주의 구도심 식당가를 누비는 거리의 가수가 있다. 청하지 않아도 주석(酒席)에 합석해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주법이 지나치게 박력이 있는데다, 줄의 조율은 정교하지 않다. 목소리는 우렁차지만 박자가 자유분방하고 꺾는 기법은 원로가수 현인(2002년 작고)의 바이브레이션을 연상케 한다.

2014년 12월 청주시 서문시장 골목의 한 순댓집에서 그 ‘거리의 가객’을 오래간만에 다시 만났다. 콜라를 시켜서 한 잔 마시고 변함없는 연주와 창법으로 노래 두 곡을 불렀다. 일행 중의 하나가 5000원을 드렸다. 그러나 “만원으로 올랐는데…”라며 받지 않았다.

누군가 다시 만 원짜리를 건넸다. 그가 떠난 뒤에도 화제가 잠시 그를 둘러싼 과거에 머물렀다. 대략 20년 전부터 저 할아버지를 봤다는 것과 10년 만에 봤다는 사람부터 최근에도 본 적이 있다는 사람까지. 2015년 1월과 2016년 4월, 취재를 위해 그를 다시 만났다. 휴대폰도 없다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 삼겹살 거리 초입에서 기다렸다. 어둑해지는 저녁 7시, 그는 약속한 듯이 ‘함지락(삼겹살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인장의 소개로 손님 테이블에 앉더니 ‘홍도야 울지 마라’를 열창한다. 박수를 쳐주던 사장님이라는 50대 남자가 지갑에서 만 원 한 장을 꺼내 건넨다. 서둘러 돈을 받아 옷섶에 챙긴 가객의 이름은 이철남. 1939년생이니 올해 78살이 되는데, 청주상고(현 대성고) 18회라는 점을 강조했다. 고향은 북문로인데 6년 전쯤에 내수 삼일아파트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평생 노래하면 사신 거예요?’라고 물으니 “평생을 무명가수로 살았다”고 했다. 이철남의 노래인생을 조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오직 이 씨의 기억에 의존할 뿐이다. 취재를 하면서 느낀 것은 기억의 심층에 돌덩이 같은 자부심이 버티고 있다는 점이었다.

1960년 현대극장(현 철당간 옆 롯데영플라자 자리)에서 전국 콩쿠르가 열렸단다. 거기서 ‘가거라 38선아’를 불러 최우수상을 받았고 서울로 올라와서 활동하라는 권유도 받았다고 한다. 1964년에 ‘백제야화’ ‘나는 왔네’ 등 자작곡을 묶어서 신신레코드에서 음반도 취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1965년 연예병사로 입대를 했단다. 예나지금이나 연예병사로 군대를 갔다면 ‘끼’를 인정받았다는 얘기일 터다.

“연예병사가 되어 원주에 있는 1군 쇼단체에서 노래를 불렀지. 제대하고 나서 시내에 있는 삼화캬바레에 취직이 돼서 노래를 불렀고. 젊을 때는 내가 꽤 유명했어. 지금도 가수들한테 안 째여(밀리지 않는다는 의미). 돈이 아니라 실력을 보여주려고 지금까지 노래를 하는 거야.”

그렇다면 언제부터 거리의 가객으로 살아온 걸까?

“캬바레에서 일하는데 하루는 단골손님이 부르더니 ‘이런 데서 노래하면 오래 못 산다고, 예순 살도 못 넘긴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온 거야. 그게 1976년이니까 37살 때. 젊어서는 서울사람하고 둘이 다녔어. 그 사람이 기타나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나는 노래 부르고. 그때만 해도 청주에 요정이 50개는 됐으니 돈도 좀 벌었어. 아들 둘은 그렇게 해서 대학까지 가르쳤으니까.”

56년의 노래인생 중 40년을 집시처럼 거리를 떠돌았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집이 내수라고 했다. 밤늦게까지 술집을 돌며 노래를 부를 텐데 출퇴근(?)은 어떻게 하는 걸까? 2015년 1월만 해도 밤 12시까지 노래를 부르고 내수까지 2만여 원을 주고 콜택시를 대절한다고 했었다.

“늘 이 집이 첫 집이야. 여기 주인장이 친절하고 손님들에게 소개도 해주거든. 밤 11시까지 스무 집 정도를 거치는데 요즘엔 4,5만원 벌기도 힘들어. 부른다고 돈을 다 주는 것도 아니거든. 대개 만 원을 주는데, 주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어쩌다 2만원 주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못 이기는 척하고 얼른 받는 거지. 요새는 밤 11시10분에 시내버스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가. 경기가 영 좋지 않아서….”

무명가수 이철남은 언제까지 거리의 가객으로 남아있을까? 1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등이 더 굽었고 얼굴의 주름도 골이 더 깊어져 있었다. 2016년까지만 활동을 할 거라고 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그 사람은 요즘 업소에서 잘 나가는 실력자란다. 그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얘기다. 평생을 걸고 매일 같이 열렸던 그만의 가요무대가 막을 내릴 날도 멀지 않았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