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 목사·장일순 선생님의 대화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김상수 충북재활원장

▲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장일순 지음, 이현주 대담·정리, ㈜도서출판 삼인 펴냄.

‘道를 아십니까?’ 거리에서 행인을 현혹하는 단체에 의해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2600년 전의 노자(老子) 李耳가 들었다면 빙그레 웃었을 듯 합니다. 아니면, 道를 쉽게 알아듣는 현대인을 기특하다 했을까요?

노자는 말로 하는 그 道는 道가 (道可道 非常道) 아니라고 했습니다. 도덕경의 첫 장에 道에 대한 전체 이해를 던져 놓은 셈입니다. 이 책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은 이현주 목사님과의 대담을 통해 노자의 가르침을 더 쉽게 풀어 주셨습니다. ‘道란 안다 모른다에 속하거나, 말로써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동양 사상의 깊이는 모른 채, 형이상학을 논술하는 서양철학에 취해 있을 때 였습니다. 오리무중을 노래한 동양식 유유자적이 문명의 퇴보밖에 만들지 않았다는 비판을 정당하다 여겼습니다. 행간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계적인 글자의 이해를, 곧 안다고 착각했을 때 이 책을 만났습니다.

세계를 고정된 법칙으로 보는 뉴턴식 패러다임에서는 과학과 실증주의가 곧 학문의 우위였습니다. 하지만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세계를 유기적 관계에 의한 전일적 흐름으로 인식하게 한 아인슈타인 이후 패러다임의 수정이 불가피해졌습니다. 그런 유기적 차원의 영향 탓인지는 몰라도 21세기 인류의 사고는 많은 변화가 가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유물론적 가치에 대한 회의(懷疑)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적 신학체계에 동양의 오랜 사상을 보태면서,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더 확장되고, 깊어지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기록한 예수님의 육성에서 행간의 통로가 이원성에 갇히지 않고 그 스스로 절대 진리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본질보다는 기법과 요령을 익히는 것이 지름길이라 인식케 합니다. 본질에 대한 성찰과 고민은 소모적이거나, 비생산적이기에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할 일은 가시적인 것을 더 화려하게 꾸미는데 매몰되고, 밖으로만 향하도록 부추기는 문화에서 위안을 찾는 일이라 믿습니다.

말로 가르치는 대상이 아닌 道

바벨탑을 흩뜨리신 하느님에 대한 해석은 道의 삶을 정확히 이해하게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은 교묘한 사회적 이념 입니다. 군중의 삶이 근원으로부터 회복되기 위해서는 각자 흩어져 대자연(하느님, 道)에 뿌리박아야 합니다.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존재양식으로 서지 않으면 진정 산다고 할 수 없으며, 道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근원, 축은 ‘대자연(道, 하느님)’입니다. 눈으로 확증하는 현상계는 삶의 축이 아닙니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 하느님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볼 수 없으며 스스로 계시는 분, 道입니다. 그래서 道는 말로 가르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저 안과 밖, 개인과 전체, 유명과 무명, 하느님과 나의 이분될 수 없는 이치를 아는 깨달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목적은 깨달음을 위한 여정이어야 합니다. 진리는 먼 데가 아니라, 바로 이 안에 있기에 노자는 ‘문 밖을 나서지 않고 천하를 안다(不出戶知天下)’고 했습니다.

두 분의 대담을 통해 이해하는 노자는 대자유를 선물로 안겨줍니다. 나직이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음성을 따라 1장만 제대로 읽어도 전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道가 먼 어딘가의 형이상의 관념에 갇힌 것이 아니라, 즉각 이곳에서 펼쳐지는 현실이며, 근원이며, 전체임을 알게 됩니다.

道를 알아 행하는 삶을 德이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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