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같은 일생, 죽어서 나비 되고 모래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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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같은 일생, 죽어서 나비 되고 모래알 되고
  • 충청리뷰
  • 승인 2016.04.0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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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이영순·구석봉 시인의 시비를 찾아서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4)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송호국민관광지는 금강 가에 조성된 널따란 소나무 숲인데, 28만여㎡ 부지에 빽빽이 들어선 노송과 강물이 어우러진 풍광이 일품인데다가 물놀이장, 산책로, 방갈로 등 각종 휴양시설을 잘 갖춰서 여름에는 휴양지 노릇을 톡톡히 하는 곳입니다. 여가를 보내는 모양도 유행을 타는 요즘에는 오토캠핑장으로 더욱 유명세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이 고장 출신 작가들을 기리는 시비(詩碑)를 곳곳에 세워놓고, 따로 ‘문향의 숲’이라는 빗돌을 세워 안내하는 건 이색적입니다. 삼국시대 때는 백제와 국경분쟁이 심했던 곳이었는데, 신라 태종 무열왕 때 백제군의 기습을 받고 싸우다 전사한 김흠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신라 사람들이 지어 불렀다는 <양산가> 노래비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래 남는 거 무서운 줄 모르고 너무 쉽게 돌에 글자를 새긴다고 걱정이 많은 당신의 눈엔 마땅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송호리 국민관광지에 건립된 이영순 시비(사진 위)와 구석봉 시비. 시 <나비>와 <목숨>이 각각 새겨져 있다.

이영순(1922~1989)의 시비엔 시 <나비>가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八月의 나비가 된다./神의 부드러운 입김을 속 입으며/동녘의 하늘을 난다.//도라지꽃 피는 언덕 너머/사랑이 숨쉬는 님의 품안/눈을 감은 채 날개는 닿는다.” 이영순 시인은 양강면 가동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비에 적힌 두릉리는 가동리에 속한 자연부락입니다. 일본 동경대학 유학 중 학도병으로 출정했다가 광복 후 귀국해 대한민국 육군 창설에 참여했고, 이후 군 요직을 두루 맡았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1947년 <서울신문>에 전쟁소설 <육탄(肉彈)>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활동했지만, 1951년 한국전쟁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첫 시집 《연희고지》을 펴낸 이후로는 줄곧 시인으로 살았습니다. 《연희고지》는 전투의 참상을 직설화법으로 서술한 장시(長詩)로서 제2시집 《지령》와 함께 전쟁시를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작품입니다.

‘전쟁시’라든가 ‘군인 시인’이란 말 앞에서 적잖이 당황스러워집니다. 그런 모순적 용어의 성립이 가능한 거냐고, 당신은 펄쩍 뛸 게 틀림없습니다. 승전의식과 반공,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시 경향이 짙었을망정 전투와 창작을 동시에 치열하게 치러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전쟁이란 파멸의 축제죠.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파괴하며, 끝내는 인간성까지 무너뜨리는 그 광풍 앞에서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인간이라면 말이죠. 뚜렷하진 않더라도, 이영순의 작품세계가 반전(反戰)과 휴머니즘, 인간의 근원적 고뇌에 천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필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군인으로서 시인으로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이 컸던 일생이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시 <나비>가 이승의 업을 다 내려놓고 훨훨 날아가고픈 마음으로 읽히는 건 그 때문일 겁니다.

구석봉(1936~1988)의 시비에는 시 <목숨>을 새겼습니다. 절명시를 읽는 느낌이 편안합니다. “송천이 양산강”이란 시구를 읽노라면 향산(鄕山)이란 아호를 썼던 시인의 애향심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석봉은 영동읍 설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에 애착이 갑니다.

▲ 용산면 상용리 사거리에 세워진 김수온 시비.

구석봉이 고교시절 학원문학상에 시 당선된 작품입니다.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재학 중이던 1957년에 시집 《피의 역사》를 펴냈다고 하니까 일찌감치 문재를 인정받은 거죠. 《학원》은 1950~1970년대 중고생을 대상으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문예지였다고 합니다.

“그 해만의 특권처럼 음탕한 6월이 숨어 버리고, 뒤미처 달려온 7월도 흠뻑 자란 어느 날, 나는 마을 사람들의 박꽃 얼굴빛을 본뜨고 있었다.//우리들의 뒤로는 훌훌히 버리고 뜬 푸른 산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집과 황량해진 논밭이 조을고 있었다.// - 거기 지나쳐 간 갖가지 슬픈 실화들이 있었다.//(…) 우리들의 뒤로는 미망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시가지엔 죄인 같은 고아와 불구자의 행렬이 밀려가고 있었다.(…)”

고등학생의 글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뛰어난 관찰력을 바탕으로 전쟁의 상처를 노래했습니다. 1950년대 말 전쟁 통에 고향에 내려와 머물면서 감나무 가로수 심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던 구석봉은 1960년 희망사 역사소설 현상모집에 <아리랑>이, 1963년 동아방송 개국 기념 현상 모집에 <차령산맥>이 잇달아 당선되는 것을 계기로 고향을 떠났습니다.

서울에서 시·소설·희곡은 물론 방송드라마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나, 몸이 오래 견뎌주지 않았습니다. 1988년 52세로 타계했으니 향년이라 하기에도 민망합니다. 내 나이를 물었다가 당신은 “벌써 50이 넘었단 말인가!” 하고 놀라움에 탄식을 섞어 반문했었죠? 지금 내 나이라면 아무래도 안타까움이 적지 않았겠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단 사십으로 한 생애를 접고 만 권구현이란 사람도 있는 것을! 하늘이 사람을 내면서 남다른 재능을 주고 어찌 수명엔 인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석봉 시인은 바람대로 ‘송천이 양산강’에 모래알로 돌아와 있을까요?

다시 19번 국도에 올라 북쪽 용산면으로 향합니다. 용산면은 조선 초 문장가 김수온(1409~1481)의 고향입니다. 그는 책장을 찢어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며 읽을 만큼 지독한 독서가로 유명했는데, 다 외우고 나면 버리고 마는 통에 사람들이 그에게 책 빌려주기를 꺼려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입니다. 32세의 만학도로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음에도 조선 문장팔대가로 꼽힐 만큼 문명(文名)을 떨쳤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영동 나들목으로 들어서기 직전인 상용리 사거리에서 김수온의 한시 「題高峯雲月軒」을 읽고 갑니다.

“구름에는 부침(浮沈)이 있고 달에는 회명(晦明)이 있는데/그것은 원래 저 허공의 맑음만 못하다./그대를 빙자해 저 고둔객에게 말하노니/음청(陰晴)을 가지고 일생(一生)을 희롱하지 말라.”라고 새겼건만! 시비 뒤에 ‘바르게 삽시다’라고 새긴 비석을 보니 쓴웃음이 납니다.

방방곡곡 들머리에 ‘바르게 살자’는 구호를 육중한 돌에 새겨 온 국민을 죄수 취급하는 게 늘 못마땅했는데, 존댓말로 쓴 걸 보니 영동지방의 격조를 알 만합니다. 아, 맑은 허공은 멀고 회명음청(晦明陰晴)은 가까워서 희롱으로 해가 지는 일생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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