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출신 월북작가 고 황영준화백, 동생 석중씨의 사연

지난 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생사도 모른채 이산가족이 됐던 형제가 북녘 형님의 그림을 통해 54년만에 고향땅에서 상봉하게 된다.

 북녘의 형님은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북녘작가미술대전’에 작품이 출품된 옥천 출신 황영준 화백(2003년 작고)이다. 북측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은 원로작가인 황화백은 생전에 예정됐던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9 11테러로 무산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현재 옥천에 살고 있는 동생 황석중씨(74)는 청주에서 전시되는 황화백의 작품(병풍 1점, 산수화 4점)을 하루빨리 만나기 위해 조바심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살고있던 황화백은 아내와 2남2녀의 자식을 먼저 옥천으로 피난시킨 뒤 ‘1주일후에 내려오겠다’는 약속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겼다. 전쟁통에 숨진 것으로 판단한 가족들은 황화백의 생일인 9월 9일에 기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교통부박물관의 화가로 근무했던 황화백은 보관작품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끝까지 남아있다가 인민군에게 납북됐다는 것이 가족들의 주장이다. 당시 32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일제의 국전과 해방후 선전에서 입선하는등 동양화단의 주목받는 작가였다. 따라서 북측에서 강력하게 월북을 권유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40년간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던 황화백은 지난 91년 TV속에서 북의 화가 ‘황영준’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자막으로 등장하면서 살아났다. 당시 평양에서 국제의원연맹(IPU) 총회가 열렸고 남측 대표단을 동행취재한 방송사에서 북측 황화백을 짤막하게 소개했던 것. 이 방송을 청주에 살고있던 차녀 명숙씨(55)가 보고 가족들에게 알렸다.


“제사까지 지낸 분인데, 살아계신다니 그 기쁨과 놀라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나와는 나이 차가 12살 터울이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형님이신데…, 91년 방송을 보고난뒤 중국을 통해 연락을 취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수차례 중국을 방문했지만 번번히 속기만 하고 편지 한 장 전달받지 못했다. 수차례 당하다보니 진저리가 나서 아예 조카들에게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응하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동생 황씨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악용해 돈을 챙기는 ‘브로커’들에게 혀를 내둘렀다.
어떤 이들은 가족들의 사진을 모두 찍은 뒤 황화백에게 전달한다고 했고, 황화백의 그림을 직접 구해왔다며 구입을 권하기도 했다. 동생 황씨와 가족들이 황화백의 그림을 직접 접한 것은 지난 92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북한미술전’이었다. 지난 95년 ‘북한미술의 오늘’전과 97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북한 원로작가전’에서도 황화백의 작품이 비중있게 전시됏다. 전시회를 통해 구입한 ‘절승만개 금강산’ 작품은 황화백의 장남 인호씨(61 캐나다 거주)가 소장하고 있다.


6?15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본격화되면서 가족들은 대한적십자사에 서둘러 상봉신청서를 냈다. 팔순이 다 된 형님과 아버지를 만나기위해 가족들은 속을 졸였지만 번번이 상봉가족 명단에서 탈락됐다. 마침내 2001년 3월 황화백과 가족들의 이름이 상봉자 명단에 포함됐지만 예기치않았던 미국 9?11테러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이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지난해 상봉이 재개됐으나 북측 명단에서 황화백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연기만 된 것으로 알았는데, 상봉자 명단에서 빠져있었다. 대한적십자사와 정보기관에 알아본 결과 형님은 2003년 3월 9일에 운명하셨다고 알려줬다. 남쪽 형제자식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이 물거품이 되면서 충격이 컸을 것으로 본다. 대북 ‘브로커’들과 접촉을 끊은 것도 행여 형님에게도 누가 될까 싶어서 자제했던 것인데…1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훌쩍 떠나셨으니 가족들 심정이 어떻겠는가.


동생 황씨의 집 거실에는 황화백이 지난 96년 완성한 대작 ‘금강산의 봄’이 걸려있다. 이 작품은 북의 경수로사업 지원을 위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소속으로 북에 상주했던 직원들이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한국전력 본관에 걸어두었으나 같은 한국전력 직원이었던 동생 황씨의 사연을 알고 있던 사장실에서 기증토록 조치했다는 것. 이밖에 황화백의 2남 2녀들도 그동안 남녘에서 열린 전시회 등을 통해 아버지의 작품을 구입, 소장하고 있다.


황화백이 남녁 가족들에게 남긴 것은 그림 이외에 한통의 편지였다. 남북적십자사 간에 서신교환 작업이 추진되면서 황화백의 2001년 3월 친필편지가 전달됐다. 팔순 아버지의 그리움과 한이 편지지 3장에 짙게 번져 있었다. ‘오매에도 그리운 내딸 정숙이에게’로 시작된 편지는 ‘너희들을 한시도 잊은적 없는 아버지 황영준으로부터’로 끝맺는다. 황화백의 편지에 따르면 북에서 재혼해 아들 금철씨(50 의사)를 둔 것으로 나타났다.


“어찌됐든 한 아버지 피를 받은 자식들 아닌가? 내가 나서지 않으면 남북 조카들끼리 서로 찾아나서기는 힘들 것으로 본다. 죽기전에 형님을 대신해 내가 해야 할 일인데…, 형수님과 큰조카는 캐나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번 전시회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 청주에 사는 조카 딸과 함께 전시회에 꼭 참석하겠다” 동생 황씨는 형님의 작품화보집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내가 해야 할 일’을 거듭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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