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담화/ 오옥균 경제부 차장

▲ 오옥균 경제부 차장

정부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지역의 주택난을 해소해야 하고 낡은 도시의 정주여건도 개선해야 하지만 재정 사정으로 민간의 진입을 허용했다. 그렇게 민간(조합)이 주도하는 재개발·재건축, 도시개발 등의 형태가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정부의 이 같은 단순한 계산법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을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았고, 정비업체와 시행사, 시공사 등 업자(?)들만 배불리는 기형적 형태를 초래했다.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마을에 나타나고, 이들은 집집을 다니며 “이 곳에 아파트를 지으면 지금보다 몇 배 땅값을 받을 수 있다”며 개발동의서를 받았다. 후에 이 사람들은 조합의 집행부가 된다.

사업이 잘 진행되면 개발 전보다는 오른 땅값을 보상받지만 집 한 채 판 돈으로는 개발지역에 들어선 아파트 입주는 꿈도 꾸지 못한다. 무엇보다 원주민 중 상당수가 ‘집세가 더 싼 곳’을 찾아 밀리고 밀려 이곳에 정착한 세입자라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더 주거환경이 좋지 않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또 다른 낡은 동네로 짐을 싸 옮겨야 하는 것이다.

최근 조합원간 고소·고발로 소란스런 방서도시개발사업, 도로를 중심으로 용암동과 방서동·평촌동 서편에서 진행되는 이 사업으로 수백년 집성촌이 사라졌다.

사업지에 포함된 방서동은 마을이 아닌 논밭이 사업지에 포함됐고, 용암동 또한 주택이 밀집된 곳을 비켜갔다. 하지만 평촌동은 마을 전체가 사업지구에 포함됐다. 공사가 시작되자 수십년, 길게는 수대에 걸쳐 이웃으로 살던 수십가구가 뿔뿔이 흩어졌다.

평촌동은 1990년대까지도 80가구 이상이 거주하는 꽤 큰 자연부락이었다. 관련 고서 등에는 1700년대 이곳을 점촌(店村)리라고 칭했고, 1800년대는 북평(北坪)리라 불렸으며 그때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최근까지도 인근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 벌판이 있다고 해 벌말이라 불렀다.

평촌(坪村)이란 행정동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지금은 도시개발사업 현장이지만 평촌동이 청원군에서 청주시로 편입된 것은 겨우 25년 전이다. 남일면 평촌리 시절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 평범한 시골마을이었던 평촌리는 마을을 가로 흐르는 천을 기준으로 음짓(음달)말과 양짓(양달)말로 구분했고, 마을 일어나는 대소사에는 주민 대부분이 동원됐다. 연방계란 이름으로 서로를 돕는 마을의 풍습은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이 마을에 처음 뿌리를 내린 이들은 경주 김씨 일가였다. 경주 김씨 감사공파 종회에 따르면 첫 이주 기록은 없지만 조선 영조 후반(1750~1778) 이 마을에 경주 김씨 일가가 모여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청주 한씨 집성촌인 방서동(대머리)과 함께 이 지역 대표적인 집성촌이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성씨들도 이주하면서 경주 김씨 비중은 작아졌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경주 김씨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었다. 이들이 평촌동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합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전문성이 없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래서 좋다. 저래서 좋다’는 말에 동의서에 도장을 찍은 이들은 수백년을 함께 했을지 모를 이웃들과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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