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송호리 국민관광단지 권구현 시비를 만나다 2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3)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홀수 번호를 가진 국도는 남북을 잇고, 짝수 국도는 동서를 잇는다는 걸 당신에게 듣고 알았죠.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어온 4번 국도와 무주에서 압치고개로 들어온 19번 국도가 영동 읍내에서 교차합니다. 19번 국도를 따라 무주 방향으로 남하하다가 괴목교차로에서 내리면 산막리로 들어가는 길을 만납니다. 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천마산이 막아서서 막다른 길이니 ‘들어간다’는 말이 헛말이 아닙니다. 산을 넘어가는 길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차량 통행이 불편하면 길이랄 수 없는 시절이니 그렇습니다.

▲ 권구현 시인의 고향인 양강면 산막리. 천마령으로 통하는 마을 앞길은 무주와 영동을 잇는 지름길이며, 숯장수들이 흔히 오가던 길이다.

양강면 산막리, 권구현 시인이 태어난 마을입니다. 산이 막혀서 산막리가 됐을 겁니다. 479번지가 생가라고 하건만, 도로명 주소로 바뀐 것이 몇 해나 됐다고 동네 번지수를 얼른 아는 주민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노인은 늙어서 모르고 젊은이는 젊어서 모릅니다. 예전에 시를 쓰던 어른이란 말에 팔순 노파는 이름까지는 몰라도 권씨 집안에 그런 분이 있었다는 건 기억해 냅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믿음을 빌려, 기억에 남아 있다면 아직 죽은 게 아닐 테지요.

권구현(權九玄), 그의 생몰 연대에 대해 이견이 많지만 1898년에 나서 1938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호적에 ‘龜鉉’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九玄’은 필명으로 썼을 겁니다.

그의 아호 중에 ‘천마산인’은 그의 고향에 있는 천마산에서 따온 것입니다. 천마산 너머에는 각호산과 민주지산이 잇대어 있고 그 가운데 용화면 조동리가 깃들어 있으니, 천마령은 산막리에서 조동리로 가는 고개이며 영동에서 무주로 통하는 지름길인 셈입니다.

그 첩첩산중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잇는 민초들이 물건을 대처로 내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새벽에 고개를 넘어 영동장에 나갔다가 해 지고 어두운 길을 재촉해 돌아가는 숯장수들의 고달픈 삶을 눈여겨보던 권구현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외로운 별 하나/외로운 별 하나/떨어질 듯 깜박이고 있는/천마령 높은 재를/이슬 찬 이 밤에 어찌나 넘으려노//우거진 숲속에는/부엉이 소리마저 처량한 이 밤을/게다가 무거운 짐을 진 몸으로/혼자서 어찌나 넘으려노/구천동 숯장사야//오늘도 오십 리 장(市)/곱저서 백리 길 아니 걸으면/산막도 직히는 외로운 처자를/굶기게 된다고 가엽고나/구천동 숯장사야”(<구천동 숯장사> 중)

▲ 양산면 송호리 국민관광단지 숲속에 건립돼 있는 권구현 시비. 시 <구천동 숯장사> 일부가 새겨져 있다. 네모 안은 미술가이자 만화가인 안석주가 그린 권구현의 캐리커처.

유랑극단 따라나선 노마디즘

1915년 영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머물며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았으나, 가슴속은 늘 고향을 떠나 꿈을 펼치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동경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 중의 하나라고 당신은 말했었죠. 고향 마을 암벽에 ‘脫村何門’이란 글귀를 새길 만큼 권구현의 욕망은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른들은 역마살이 끼었다고 한탄했을 테고, 오늘날 철학용어로 말하자면 노마디즘(nomadism)이랄 수 있겠죠. 권구현은 정착생활을 못 견디는 유목민이었던 겁니다. 오죽하면 유랑극단을 따라 나섰을까요. 1922년 유랑극단 단원이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는 이 때의 체험을 전국 각지의 지명과 그곳의 특징을 소개한 동화 <수달피의 강산 구경>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는 유량극단에서 단가를 불렀고, 그 솜씨가 당대의 명창 이동백(李東伯)과 견주어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능하여 문학활동에 못지않게 미술활동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었죠. 1923년부터 2~3년 간 일본 유학을 다녀왔는데, 유족들의 증언이나 일련의 자료로 볼 때 주로 미술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술상식 보급을 위해 대중 강연회를 열기도 했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세 차례나 입선을 했으니 화가로서의 명성도 허명(虛名)이랄 수 없겠습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권구현은 카프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목적의식을 내세워 도식주의·기계주의 경향을 보이자 이를 비판하며 아나키즘 문학에 가담했습니다.

시집 《흑방의 선물》을 상재한 직후의 일입니다. ‘지배가 없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에서 유래한 아나키즘이 어떻게 무정부주의란 말로 번역됐는지 얼른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국가와 정부의 속성이 근원적으로 ‘지배’라는 걸 말해주는 역설일까요? 아나키즘이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으로 이해됩니다.

일찍이 ‘에스페란토’라는 국제공용어를 고안했던 폴란드 의사 자멘호프(Zamenhf. L. L.)의 마음도 같은 종류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언어에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고 판단한 거죠. 그러나 에스페란토가 그랬던 것처럼 아나키스트 또한 어느 사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일체의 권력을 부정하는 마음, 너무 아름다운 이상이어서 위험한 언어요, 사상이었을 겁니다.

시인, 소설가, 서예가, 화가 섭렵

줄을 잇는 상념을 다독거리며 양산면 송호리로 향합니다. 송호리 국민관광단지에 서 있는 권구현의 시비를 보려는 것입니다. 시인으로 소설가로, 서예가로 또 화가로, 여러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기인.

박영희와 김팔봉이 ‘내용과 형식’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을 때 ‘長劍과 白刃’의 참신한 비유로 더 유명한 평문이 된 <전반기 프로예술>을 쓴 논객이기도 했던 권구현. “뜻 아닌 이 땅에/내가 왜 떠러졌노?//모래 한 알에도/값이 있다는/이 땅에/아아 내가 왜 떠러졌노?”(<뜻 아닌 이 땅에> 전문) “낚시에 채는 고기/어리석다 말을 마오//배고픈 다음이어니/아니 물고 어이하리//아마도 이 목구멍이/웬수인가 하노라”(<其三十六> 전문)

그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비극성을 노래했던 시인, 일제의 무자비한 수탈로 말미암아 뿌리 뽑힌 삶을 살아야 했던 민중들의 현실을 인식하고 식민지 근대에 저항하며 지극한 이상향을 꿈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떠돌이의 삶을 스스로 마감했을 때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습니다. 자연히 그는 가정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란 말을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시인의 3남 권승춘 씨의 아픈 고백은 듣는 이에게도 참으로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런 시인의 삶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